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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민족시인 영랑의 삶과 예술 확산에 자랑스럽습니다_이승옥 강진 군수

기사승인 2019.06.20  15:4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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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옥 강진 군수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민족시인 영랑 김윤식의 시와 음악으로 화합과 평화의 장이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시인 김영랑(1903-1950)의 고향인 강진군(군수 이승옥)은 국립합창단과 함께 온 국민이 합창을 통해 민족의 얼을 되새기고 진취적인 미래를 향해 다함께 평화를 노래하는 콘서트를 마련했다. 민족의 서정 가객 김소월(1902-1934)과 한국 순수 서정시의 대표 시인 김영랑의 아름다운 시어들을 엮어 작곡한 창작곡을 연주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낭송(김영랑 시인의 손녀 김혜경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회장)과 김영랑 소개영상까지 다양한 구성으로 평소 클래식에 대한 어려움이 있던 사람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열린 음악회’ 성격을 띤다. 온 국민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전석 무료 초대한다. 공연예약은 국립합창단 홈페이지(nationalchorus.or.kr)에서 가능하며, 예약기간은 2019년 5월 20일(월)~부터 6월 16(일)까지다. 6.26 8pm.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인터뷰 임효정 기자 사진제공 국립합창단

 

Q. 영랑 콘서트를 이번에 국립합창단과 개최하게 된 소감은

 

전 국민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김영랑 선생이 생애 총 87편의 시를 남기셨는데, 그 가운데 국민시로 알려진 10여 편의 시를 곡(曲)화 해서 음악으로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은 영랑의 문학사적 위치나 문학적 확장성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 같고, 시와 음악의 융복합을 통해서 영랑의 시 정신과 조국애, 민족지사적 삶 등을 이번 기회에 우리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어서 좋은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 이번 음악회에 어떤 기대가 있나요

영랑 선생 고향이 전남 강진인데, 지금까지는 영랑과 관련된 모든 프로그램이 강진에 머물러 있었다면, 국립합창단과의 음악회를 계기로 전국화를 꾀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한, 이번 영랑 시 연주회 곡들을 보면 모두 대표작들인데, 교과서에서만 읽었던 작품들을 여기에 선율을 입혀서 국민적 무대에 올린다면 영랑선생의 시세계가 한층 깊이 있고, 문학적 상상력이 확산되리라 여겨집니다. 특히 저희 강진군에서도 중앙무대와 국립예술단체와 공동으로 도모하는 일이 처음이기 때문에 강진군의 군격과 영랑을 배출한 강진군민들의 자긍심, 애향심 등도 한층 깊어질 것이라 생각됩니다.

 

- 강진군에서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요

뜻 깊은 음악회를 알리기 위해 다각도로 홍보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석회’ 라는 강진 출신 서울근교 공무원들의 회합이 5월 23일 세종시 세종컨벤션홀에서 열리는데, 그 곳에 강진군수와 담당 공무원들이 참석해 음악회에 대한 설명을 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또 재경향우회가 10만 명이 넘는데, 이분들에게도 우리 고장에서 배출한 영랑 선생의 대무대인만큼 관심을 갖도록 알리고 있습니다.

 

인터뷰 임효정 기자 사진제공 시문학파기념관 · 강진군청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영랑 생가

영랑생가 전라남도 강진군 남성리 211-1번지에 있는 영랑생가(永郞生家)는 국가 민속 문화재 제252호로 이곳은 우리나라의 대표 서정시인이자 항일 민족 지사였던 영랑 김윤식 선생(1903~1950)의 생가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1903년 1월 16일 부친 김종호와 모친 김경무 사이에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3월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이듬해 상경하여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수학한 후 휘문의숙에 진학하였다. 휘문의숙 재학시절이던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자신의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 넣고 강진에 내려와 독립운동(강진4․4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 등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아오야마가꾸잉대학)에서 수학한 선생은 용아 박용철선생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후에는 시 창작활동에 몰두하였다.영랑은 1930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등과 함께 『시문학』지를 창간하요 한국 현대시의 새장을 열었다. 1934년 4월 시문학파에 의해 발행된 『문학』지 제3호에 불후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발표하였고, 1935년 『영랑시집』을, 1949년에는 『영랑시선』을 출간하였다.

선생은 조국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을 거부한 채 흠결 없는 「대조선인」으로 외롭고 의롭게 살았다. 광복 후 신생 조국 정부에 참여하였던 선생은 1950년 한국전쟁때 퇴각하는 북한군의 포탄 파편에 맞아 9월 29일 서울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선생은 생애 87편의 시를 남겼다.

영랑생가는 1948년 선생이 서울로 이사한 후 몇 차례 전매되었으나, 1985년 12월 강진군이 매입하였고, 1986년 2월 전라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10월 국가 민속문화재 제252호로 승격되었다. 정부는 2008년 선생에게 금관문화훈장을, 2018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청년 영랑

김영랑의 민족지사적 삶과 항일 시세계

지금까지 국민들이 김영랑 선생을 서정시인으로만 알고 있는데, 영랑 선생의 삶과 예술세계를 되짚어보면 철저한 민족지사적인 삶을 사셨고, 창씨개명이나 친일 문장 단 한 줄도 쓰지 않았고, 단발령 등 친일적 행위를 전혀 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1940년대 들어서는 일제강점기 최극에 달해진 시기인데, 이때는 아예 절필을 했습니다. 이러한 행적 등과 1939년대에 쓴 중기시는 모두 민족 저항의식을 담고 있어요. 그런 점들이 올해 3.1 운동 100주년을 맞은 기념일에 건국훈장 포장 추서를 하게 됐다고 봅니다. 영랑의 삶에 녹아든 민족지사적 삶이 이제야 인정을 받은 해에 기념음악회를 열게 되어 무척 뜻깊게 생각합니다

- 김선기(시문학파기념관 관장)

 

임효정 기자 Press@ithemove.com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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