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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에서 연극을 꼭 해야 해?

기사승인 2022.01.23  21: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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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드레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영국의 한 오래된 극장. <리어왕>을 보기 위해 모여든 관객들이 객석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하지만 리어왕을 연기해야 하는 노배우의 건강 상태가 심상치 않다. 노쇠한 육체는 말을 듣지 않고, 첫 대사조차 기억해 내지 못한다. 무대감독은 공연을 취소하려 하지만, 16년을 함께해 온 노배우의 ‘드레서’ 노먼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선생님’이 무대 위에 설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더 드레서'는 로널드 하우드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담아 쓴 희곡으로, 1980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초연된 후, 1983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어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으며, 2015년에는 명배우 이안 맥켈런과 안소니 홉킨스 출연의 BBC TV 영화로 제작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립정동극장에서 <더 드레서>(2021.11.16.-2022.1.1.)의 막이 올랐다. 작년 말 이미 첫선을 보였지만, 코로나와의 전쟁 상황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중간에 막을 내렸다가 꼭 1년 만에 다시 막을 올린 것이다.

‘드레서’라는 호칭을 들으면 의상 디자이너를 떠올리기 쉽지만 실은 분장실에서 배우의 의상을 갈아 입혀주고 정리해주는 스텝을 말한다. 드러나지 않는 뒷무대에서 묵묵히 연극에 헌신하는 수많은 이들을 대표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앞 무대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뒷무대의 이야기는 사실 그리 특별한 소재는 아니다. 그럼에도 <더 드레서>가 20세기 후반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데는 더욱 특별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대 뒤는 전쟁터다. 작품이 <리어왕>이니 무대 위도 전쟁터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극장 밖은 리얼 전쟁터다. 그것도 제2차 세계대전. 개막 직전 공습경보까지 울린 상태다. 여기에서 물음이 던져진다.

 

“이 상황에서 연극을 꼭 해야 해?”

배우는 생명줄의 끄트머리를 붙들고 매달린 채 몸도 정신도 엉망이다. 영광의 순간들은 다 지나가고, 이제 노쇠한 육체와 고독만 남았다. 마치 그가 연기하는 연극 속의 리어왕처럼. ‘리어왕’은 오만과 어리석음이라는 성격적 결함으로 브리튼 왕국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비극의 주인공이다. 권력의 정점에서 참과 거짓을 분별할 줄 몰랐던 왕은 맨몸뚱이로 광야의 폭풍우 속에서 헤매고 나서야 눈을 뜨게 된다. 227번째 분하는 리어왕인데도 오늘의 무대는 몸서리치도록 두렵고 불확실한 오늘의 삶은 위태롭다. 자신을 잃고 무력해진 배우에게 드레서는 왕의 옷을 입힌다. 그리고 무대로 나가게 만든다. 그게 그의 일이고, 그의 존재 가치이다. 그의 연극이고, 그의 삶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지켰고, 배우는 리어왕이 되었다. 연극이 끝나고 왕이 죽었다. 리어의 옆에는 광대가, 배우의 곁에는 드레서가 남았다. 그리고 기억이 남았다.

오늘 정동극장 무대 위의 리어왕이자 ‘선생님’은 배우 송승환이다. 젊음의 행진을 하던 그가, 앨런이었고, 톰이었던 청춘의 배우가, 얼굴에 주름 몇 개 긋고 노배우로 무대에 섰다. 시력을 많이 잃었다는데, 한 치 앞을 못 보는 게 본래 우리네 인생이 아니냐는 듯 여유롭게 미소를 날리며 우뚝 섰다. 그 후로 귀가 더 열렸다던가. 이 연극은 관계를 이야기한다. 서로를 듣고 느끼고 마음을 알아주는 관계의 소중함. 연극이 그것을 느끼게 한다. 세상 밖은 또 다른 전쟁 중이고, 극장 안은 견디고 버티고 지키는 사람들이 그렇게 뭉쳐 있다. 누군가는 안내를 하고, 누군가는 불을 밝히고, 누군가는 그렇게 또 오늘 밤의 막을 연다.

 

진남수 (호원대 교수, 극작가, 배우)

 

 

*'진남수의 무빙액트' 연재는 이글을 마지막으로 마칩니다. 

 그동안 '진남수의 무빙액트'를 애독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진남수 호원대 교수 / 극작가, 배우 namsulse@hanmail.net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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