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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기, 나의 음악] 가야금 연주자 이주인 _할아버지 선생님 이야기

기사승인 2022.06.14  15: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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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네 열심히 하게"

            사진: 고흥곤국악기연구원

 

 

1992년 경상북도 영주 시내의 한 상가건물 옥상에서 단소, 대금, 해금과 가야금 등의 소리가 저녁 무렵 울려 퍼집니다. 한소리회라는 국악동호회의 영주지부가 개설되었는데, 엄마는 직장이 끝나고 단소를 배우러 가셨다가 가야금반이 개설된다는 말에 저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때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5학년 겨울 무렵으로 서울에서 동은(桐隱) 이창규선생님께서 일주일에 1번씩 영주로 내려오셔서 가야금을 가르쳐주시고 올라가셨습니다. 

1993년 국립국악원에서 이창규 선생님과 나-초등학교 6학년, 서울에 공연하러 온다고 제일 예쁜 드레스를 입고 옴-

저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동은 선생님을 할아버지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 일 년 정도가 지나고 동은 선생님께서 서울에 국립국악중학교가 생겼으니 원서라도 넣어 시험보라고 권유해 주셨고,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가야금을 배우던 저는 칭찬도 듬뿍 받아 제가 가야금을 아주 잘 한다고 생각했었기에 국립국악중학교에 꼭 들어가고 싶어 시험을 보았습니다. 합격을 통보받고 중학교에 입학하여 정악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학교에서 사용하는 정악가야금은 영주에서 배웠던 가야금과 줄의 개수는 12줄로 같았지만, 가야금 모양이 훨씬 커서 제가 알고 있던 가야금이 아니었습니다.

               사진_고흥곤국악기연구원

 

가야금은 현재 정악가야금, 산조가야금, 개량 가야금으로 분류되는데, 저는 영주에서 산조가야금으로 정악을 배웠던 것입니다. 지방이라 정악가야금의 보급이 어려웠었고, 가야금이라고 하면 산조가야금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중학교에 입학한 저를 위해 동은 선생님께서는 악학궤범에 나온 가야금 치수대로 제 정악 악기를 주문해주셨는데, 다른 친구들의 악기보다 30cm 정도 길었습니다. 또 동은 선생님께 배운 정악은 왼손의 연주법이 훨씬 다양했었는데, 국립국악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배우는 정악은 차분하여 차이가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두 가지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으므로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동은 선생님께 배우는 것을 잠시 멈추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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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이창규(1918~2008), 종로구 사직동에서 출생하여 1931년 이왕직아악부 양성소 4기생으로 입학하였다. 교육과정을 마친 후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보로 임명되어 연주자의 길을 걸었으나 생활고로 인하여 오랫동안 상업 활동에 종사하다가 1983년 당시 국립국악원장이던 한만영의 초빙으로 국립국악원 정악가야금 사범으로 2년여간 재직하였다.

 

2) 국립국악중학교는 1955년 4월 1일 6년 과정인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로 개소하여 중학교 과정을 운영하다가 1972년 국악사양성소가 국악고등학교로 승격되면서 중학교 과정은 중단되었다. 그 후 많은 국악인과 뜻있는 분들이 국악조기교육의 필요성을 계속 역설하여 1988년 국악학교 설립을 위한 국립학교 설치령이 개정되었으며 이에 1991년 각종학교로 다시 개교하였다. (국립국악중학교 학교소개에서 참고)

 

3) 당시 시험 곡은 전공인 가야금은 대상이 아니었고, 시창 두어 곡과 필기고사, 청력 테스트 정도로 기억하는데, 일반중학교 배정을 받기 전에 시험을 봐야 했습니다. 1993년 동은 선생님께서 그려주신 지도를 바탕으로 서울 양재역에 내려 하룻밤을 자고 포이동 소재 학교에 찾아가서 응시하였습니다.

 

정악가야금으로는 예전 궁중의 음악이나 선비들이 연주하던 정악을 연주하고, 산조가야금으로는 민속악이라는 음악을 연주하는데, 산조가 대표적이다. 개량 가야금은 가야금 음량과 음역의 확대와 피아노의 흰 건반과 같이 ‘도레미파솔라시’의 7음계로 되어있어 화성 연주가 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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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인 첫 독주회

 

이후 저는 서울대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당시 서울대학교 커리큘럼은 1학년부터 2학년 1학기까지 정악을 배웠는데 故 선화 김정자교수님께서 알려주시는 정악은 어렸을 적 배웠던 연주법과 매우 비슷하여 기억을 되새기면서 연습을 하였고 재미있게 1학기 시험을 마쳤습니다. 시험이 끝난 후 김정자 교수님께서 저를 부르셔서 물어보셨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교수님의 연주법을 잘 따라 하지 못하는데 너는 어떤 방법으로 연습하였길래 정악을 잘 배워서 연주하였는지를 말이죠. 그래서 저는 제가 어렸을 적 이창규 선생님께 배웠었는데 그 수법과 비슷해서 어렵지 않았다고 대답을 하였더니 김정자 교수님께서 “내 스승님이 그분이야”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교수님의 수법을 빨리 받아들이고 잘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이었죠. 대학을 졸업한 이후 2006년 8월에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오디션에 합격하여 정단원으로 발령받았을 때 동은 선생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국립국악원에 입단한 후 가야금 연주자로 새로운 길을 출발하면서 2007년 첫 독주회를 개최하였고 제게 가야금의 인생을 열어주신 동은 선생님과 별곡 무대도 함께 하였습니다. 아흔의 연세에 20대의 패기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성음을 동은 선생님께서는 들려주셨습니다. 2년 전 일초(一超) 김종희 선생님과 함께한 미수기념 연주회에서도 한바탕을 거뜬히 연주하셨던 모습을 떠올려보면 일평생 정악가야금만 연주해오신 그 길을 감히 지금의 세대는 쫓아갈 수 없음을 체감합니다. 

2007년 동은 선생님과 함께한 첫 독주회

 

-이주인, 故동은 이창규, 姑선화 김정자-

 

 이후 동은 선생님께서는 노환으로 기력을 점점 잃어가셨고 2008년 여름에 들어서는 포이동 소재의 병원에 입원하셔서 사람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누워만 계셨습니다. 퇴근하는 길에 병원에 종종 들려 CD플레이어를 가져가서 제 귀에 하나, 동은 선생님 귀에 하나 이어폰을 나눠 끼고 첫 독주회 음악을 들려드리면서 “선생님~ 들리시죠? 저랑 또 같이 가야금 하실 수 있게 어서 일어나세요.”라고 했었죠. 그러던 중 하루는 눈도 뜨시지 않았지만, 동은 선생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어요. 정확한 음성으로 말이죠.

 

“자네, 열심히 하게”

 

그 말씀에 다시 말을 걸었지만, 동은 선생님은 또다시 침묵하셨고, 그해 9월에 소천하셨습니다. 동은 선생님께서 남기신 정악을 잇고 있고,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에서 현재의 음악을 쌓고 있는 저는 가야금 연주자 이주인입니다. 할아버지 선생님께서 제게 남겨주신 “자네, 열심히 하게”라는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요.

 

이주인 (가야금 연주자, 국립국악원 국립창작악단 )

 

이주인

 

 

 

*필자는 영주에서 ①인 산조가야금으로 정악을 배웠는데, 원래는 ②인 정악가야금으로 정악을 연주한다. 각주4)의 악학궤범에 나오는 가야금은 정악가야금이었고, 예전에는 가야금이라고 하는 것은 정악가야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산조가야금은 19세기 후반 산조라는 새로운 음악이 등장하면서 같이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THE MOVE Press@ithemo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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