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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무용+人] 하정애 전) 국립현대무용단 이사장_<육완순, 그녀에게>

기사승인 2022.08.09  13: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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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육완순 추모 1주년 기념공연’의 의미와 평가

 사진 설명_ <육완순, 그녀에게> "초혼"  _(사)한국현대무용진흥회

 

‘(故)육완순 추모 1주년 기념공연’의 의미와 평가

어느덧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빈농(貧農)의 자식이었던 나는 부모님 몰래 무용학과를 졸업하고 막 무용단에 입단했을 무렵, 춤추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노라고 찾아온 대선배의 작품에 처음으로 주역을 맡아 연습을 마치고 밤늦게 자취방으로 돌아왔었다. 문을 열자 캄캄한 방에는 유선 전화기의 자동 응답기가 녹색불을 깜박이고 있었다. 몇 년째 병환 중이셨던 아버님의 사망이라는 비보(悲報)였다. 새벽이 다 되어서 본가에 도착해 아버님 곁을 지키다 마지막 가시는 길을 뒤로한 채 약속된 무대에서 춤을 췄다. 그래서일까 그 이후로 나는 다른 사람의 장례식장에서 조의를 표하고 명복을 비는 일에 인색해지고 죄의식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7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한 <꼭두의 눈물>이라는 작품을 통해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아버님을 비로소 보내드렸다. <꼭두의 눈물>은 나만의 진혼무(鎭魂舞)이자 천도제(薦度祭)였다.

  =>사진 설명: <육완순, 그녀에게>  "영혼의 불꽃"

 

작년 이맘때였다. 항상 인자한 미소와 냉철한 이성, 지치지 않은 열정으로 내게 흠모의 대상이셨던 현대무용진흥회 육완순 이사장님께서 작고하셨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사고가 정지된 듯 한참 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코로나가 한창이었던 때라 마음대로 조문도 못 하고, 운구행렬도 이미 계획된 일정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해 마음 한 곳에 비통함과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2022년 7월 21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추모 1주기를 기념한 <육완순, 그녀에게>라는 헌정 무대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창기 제자들의 헌무(獻舞)를 마주하자마자 가슴이 먹먹하고 형언할 수 없는 설움에 볼을 타고 마스크 안으로 스며든 눈물로 인하여 한참 동안 내 시선은 허공을 이리저리 맴돌았다.

 

 

춤을 사랑하는 정신이다. 

생명의 가치를 춤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춤은 선생님께 존재의 가치인 셈이다.

                                                    "    

하정애   전) 국립현대무용단 이사장

이번 <이 시대의 무용+人>에서는 故 육완순 이사장님을 추억하기 위해 제자이자 후배이며 동료로서 가장 오랜 시간 함께한 전)국립현대무용단 하정애 이사장을 만났다.

 

Q. 바쁘신 중에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먼저 故 육완순 이사장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1963년 한국 최초로 이화여자대학교에 무용학과가 설립되었고, 그 당시 우리를 가르치던 현대무용 선생님은 미국인 테프트(Taftte)와 박외선 선생님이셨다. 내가 2학년이 되었을 때, 육완순 선생님께서 이화여대로 오셨다. 선생님께서 1963년 미국에서 귀국하시어 경희대에서 재직하시다가 이듬해인 1964년에 이대에 부임하시면서 나는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 당시 육완순 선생님께서는 YWCA에서 주 2회에 걸쳐 각 대학에서 모인 현대무용 전공자들을 지도하셨는데, 주로 경희대와 이대생들이 주축이 되어 class가 운영되었다. 그때 경희대 학생들은 체육과에서 무용을 전공으로 하는 여학생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남학생도 3~4명 정도 있었다.

1965년, 선생님께서는 첫 개인 공연을 명동극장(그 당시는 그곳이 국립극장이었음)에서 개최하셨는데, 그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학교와 관련된 공연을 비롯해 선생님의 개인 발표회 등을 포함한 크고 작은 여러 공연에 참여하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육완순 안무_ <먼훗날> _(사) 한국현대무용진흥회

Q. 평소 깊은 신앙과 규칙적인 생활로 자기 관리에 철저하셨던 이사장님의 갑작스러운 부고에 많은 사람이 충격과 슬픔에 빠졌을 것입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 하셨던 하정애 이사장님께서 느낀 상실감은 남달랐을 텐데 그때의 상황이나 감정은 어떠셨는지 말씀해주십시오.

선생님께서 작고(기일은 7월 23일)하시기 일주일 전에 선생님과 나, 김화숙, 정귀인, 남정호 선생은 국립현대무용단 정기공연 관람차 서초동 예술의전당 카페 ‘테라로사’에서 환담하고 헤어지면서 선생님과 나는 8월 20일경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나는 7월 17일부터 한 달간 그리스 여행이 예정되어 있었고, 선생님의 부고를 받았을 당시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마테오라 수도원을 순례 중이었다. 아침과 저녁기도 시간을 알리는 수도원의 종소리는 ‘지나간 일을 되풀이하여 기억하고 음미’하는 반추(反芻)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나의 마음을 심하게 요동치게 하였다. SNS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현대무용진흥회 이미경 사무국장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하며 보내기에 바빴으며, 한편으로 내 남은 일정을 어떻게 보낼지 많은 시간 사념(思念/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함)에 잠겨 있었다. 코로나로 인하여 여행자들에 대한 관리가 엄격했고, 2주간의 자가격리 기간이 정해져 있어서 귀국해도 집 밖의 활동을 할 수가 없어서 그리스에 머물며 선생님 장례에 따른 현대무용 진흥회의 역할과 황망하게 떠나시며 남겨 놓으신 일들에 대해 어떻게 정리해 나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하셨던 터라 선생님의 건강은 90을 바라보는 노인답지 않게 정정하셨고, 1~2년 내에는 돌아가실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처음 부고를 접했을 때,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고, 멍~한 상태로 할키디키(Halkidiki) 해변 모래밭에 앉아 한나절을 보내곤 했었다.

 

육완순 안무_<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_(사)한국현대무용진흥회

 

Q. 현대무용의 불모지와 같았던 대한민국에 새로운 무용 어법을 도입하신 현대무용의 선구자로서 故)육완순 이사장님의 예술철학과 업적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육 선생님의 업적은 학위논문 자료가 될 만큼 방대하고,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1주기 추모 공연 <육완순, 그녀에게> 프로그램에 「선생님을 추모하며」라는 글에서 밝혔듯이 한국 현대무용을 꽃피운 초석이며 원동력이셨다. 교육자로서, 국제적 행사를 주관한 행정가에 이어 젊은 무용가들을 해외로 진출시키는 교두보와 프로모터(promoter) 역할까지 수행하신 분이다. 선생님의 예술철학은 ‘나는 한국인이다 + 나는 크리스찬이다 + 나는 많은 땀을 흘렸다’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가 남긴 안무 노트를 보면 이런 정신이 면면히 나타나 있다. 국악을 사용한 작품으로 <숲>, <무녀도>, <비단길>, <학>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초혼>, <흑인영가>, <어머니의 정원> 등 많은 작품 속에서도 한국인의 정서(emotion)를 많이 담아내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던 선생님은 그의 생애를 통해 최고, 최대의 작품으로 항상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셨다. 이 작품은 이화여대 교목실의 위촉을 받아 1973년 제작되어 이대 강당에서 부활절 예배로 초연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49년 동안 수 백회 공연을 했고, 이 공연 수익금으로 많은 후원과 선교 활동 비용으로 활용하였으며, 이러한 공로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미국 코헨대학으로부터 받으셨다. 모든 일에 철저하신 분이지만 특히, 공연을 앞두고 선생님은 우리를 혹사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습을 많이 시키셨다. 평소에도 아침 7시 30분부터 8시 50분까지, 저녁 5시 10분부터 7시 30분까지 주 3일 이상 연습이 있었고, 공연을 앞둔 때의 연습은 매일 저녁 5시 10분부터 시작하여 ‘오늘은 그만’ 할 때까지 연습은 계속되었다. ‘일상 속에서도 땀의 대가는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생활철학을 지니고 살아가신 노력파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고)육완순 1주기 추모공연  중 최두혁ㆍ이윤경 출연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 출처:현대무용진흥회

 

 

Q. 대한민국을 이끈 1세대 현대 무용가는 故)육완순 이사장님과 초창기 제자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육완순 이사장님께 영향을 받은 1세대 현대 무용가들의 면모와 성취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2010년까지 4년제 정규대학에 소속되어 있는 무용학과의 현대무용 교수의 70%가 이화여대 출신이었다. 그 당시 전국 약 200개 대학교(2년제 대학포함) 중에 40개 대학이 무용과를 개설하고 있었으며, 이 수치가 대변하듯 1970년대에서부터 80년대에는 ‘무용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불릴 정도였고, 그 전성기에 우리는 통칭 ‘육사단,’이라 불렸다.

대부분 대학교수로 자리를 잡은 1세대들은 선생님께서 한국 컨템포러리 무용단을 창설하여 활동하신 것처럼 문하생들로 결성된 동문 현대무용단을 조직하여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지역별로 구분하면 서울에 한국컴템포러리 무용단(이대 졸업생 주축)을 중심으로 8개 동문 단체와 경기도에서 3개 단체, 충남의 1개 단체, 대구의 1개 단체, 호남 2개 단체, 부산 4개 단체가 활발하게 활동을 하였으며, 이 중 2개의 단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대 출신의 교수가 지도하는 동인단체였다.

위 언급된 무용단들이 각기 1년에 한 번씩 정기공연은 물론, 그 외 명분에 따라 연중(年中) 2~3회 정도의 공연이 있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숫자로 볼 때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1990년 ADF Seoul 폐막식 행사를 마치고수강자 386명중 유일한 장학생으로 뽑힌 정기정과ADF본부장인 찰스 라인하트,한국 스테프들과 함께 기념촬영.좌로부터 하정애,장학생 정기정,김양근, 육선생님, 찰스,박인숙, 신상미.(세종문화회관)

 

Q. 육완순 이사장님께서 이화여자대학교 재직 시절 제자이자 현재도 안무가와 무용수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윤경ㆍ장은정을 비롯하여 <슈퍼스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배출된 최두혁과 SCF를 통해 성장한 이인수 등 대한민국 무용발전과 국제교류에도 많은 업적을 남기셨는데, 언급된 무용가 외에 육완순 이사장님 영향 아래 성장한 무용가들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서울국제안무페스티발(Seoul International Choregraphy Dance Festival)은 창설된 지, 올해로 31년이 된다. 처음 시작은 한국 안무가 페스티벌로 시작하여 그 해에 최우수작을 프랑스에서 열리는 바뇰레국제안무대회에 참가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2000년대에 들어와 우리가 주체가 되어 국제안무대회를 하는 것으로 확장하였다. 그래서 명칭도 SCF로 바꾸며 국내외 젊은 안무가들이 많이 참가하여 자기들의 이야기와 생각들을 춤으로 표출하는 장(場)을 만들게 된 것이다. 현재 이 무대를 통해 배출된 무용가들이 국내 춤 무대를 점령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춤꾼들이 많다. 김성한, 이경은, 김보라, 김재덕, 김용철, 김재승, 김진미, 전혁진, 조양희, 박근태, 허경미, 지경민, 정철인, 이지희 등 앞에 열거한 사람들은 국공립 무용단 혹은 개인무용단을 결성하여 현장에서 활동하거나 교육자(교수)가 되어 후학을 이끌고 있다.

 

2012년 국립현대무용단 창립 축하회(아르코예술극장 로비)박일규ㆍ유인촌ㆍ하정애ㆍ육완순ㆍ김화숙ㆍ박명숙ㆍ홍승엽
 

Q, 故)육완순 이사장님께서는 한국 현대무용 발전뿐만 아니라 국제교류를 추진하며 많은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어떤 업적이 있었으며, 육완순 이사장님에 대한 해외에서의 평가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국제교류를 통해 우리들의 사고를 확장하고 춤의 방법론을 터득하도록 큰 역할을 한 것은 ADF Seoul 행사였다. 1990년에 세종문화 회관에서 시작하여 2,000년부터는 명칭을 KADF로 바꾸어 2014년까지 국민대학교에서 개최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현대무용의 다양한 테크닉을 배우고, 안무하는 과정과 무용인들의 바른 자세와 무용 기능 강화를 위한 근육의 발달을 돕는 무용 치료의 한 분야인 Dance Therapy가 주된 교육프로그램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서울 세계 청소년 무용축제, 세계적인 무용가들의 초청 work shop, SCF(서울 국제 안무 페스티벌)의 창설과 함께 연계되어, 한국 무용가들의 세계 진출을 돕는 프로모터 역할까지 하셨다. 국제적인 일을 하니 국제적 network가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 현대무용진흥회는 중동지역을 제외하고 유럽·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걸쳐 연결망을 가지고 있으며, 일찍이 미국 유학 경험을 갖고 계셨던 선생님은 8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ADF의 교수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2012년 국립현대무용단 창단식(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고)육완순 이사장님의 손짓. '현대무용이 미래를 향해 나간다는 의미' 좌측부터 이숙재ㆍ홍승엽ㆍ 이정희ㆍ육완순ㆍ박명숙ㆍ하정애ㆍ 이예순ㆍ박인숙

 

 

Q. 하정애 이사장님께는 스승이자 선배이자 동료셨던 故)육완순 이사장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합니다.

 

수많은 제자 중 몇이나 선생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을까? 선생님께서는 적시 적소(適時適所/알맞은 때와 꼭 알맞은 자리)에 사람을 발탁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으셨다. 선생님께 직언을 잘했던 나는, 가끔 선생님으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힘들어 마음이 편치 않을 때, 신앙적인 대화를 나눌 때(나와 선생님은 같은 종교이다), 나에 대한 그의 믿음이 크게 느껴지곤 하였다. 나의 일터는 부산이어서 서울에서 활동하던 후배들과는 달리 선생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나와 선생님은

일을 의논하거나 작업을 위해 만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여러 면에서 많은 재능을 갖고 계셨지만, 나는 행정가로서의 소양을 가장 많이 지니고 계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 선생님께서 ‘문체부 장관이 되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미래를 바라보는 선각자의 생각, 부지런함과 끈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는 신앙심을 지니신 나에게 가장 큰 스승이셨다.

 

 

Q. 앞으로 故)육완순 이사장님의 업적을 기리고 숭고한 정신을 알리는 기념사업에 대한 구상은 있으신지요?

아직은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 선생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잘 이끌고 나가는데 정성을 다할 것이다.

 

2018년 신년 하례 모임좌측 상단부터 안애순ㆍ박명숙ㆍ 윤승옥ㆍ이윤경 ㆍ강혜련좌측 하단부터 안신희ㆍ김화숙고)육완순ㆍ하정애ㆍ 양정수ㆍ김현남

Q.  故)육완순 이사장님께서 대한민국 무용계에 남기신 가장 중요한 유산은 무엇이라고 생각되시는지요?

춤을 사랑하는 정신이다. 선생님의 일상에서 춤은 항상 우선순위이다. 그 의미의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가치를 춤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춤은 선생님께 존재의 가치인 셈이다.

 

 

 

하정애

○신라대학교 무용학과 교수역임(1980~2010)

○한국컨템포러리 무용단 회장(1978~1980)

○한국현대무용협회 회장(1985~1987)

○한국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1999~2002)

○한국현대무용진흥회 부이사장(1985~2018)

○국립현대무용단 이사장(2018~2021) 외 다수.

 

<수상>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2004)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표창(2004)

○86 서울 아시안 게임(1986), 88 서울올림픽게임(1988), 동아시안게임(1997),

02 부산아시안게임(2002) 운영공로 표창

○대한민국 문화훈장(2003)

○대한민국 근정훈장(2010) 수훈 외 다수

 

 

 

김종덕 세종대학교 뉴미디어퍼포먼스융합전공 초빙교& choom1020@hanmail.net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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