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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 부릅뜬 “살아있는 지성” : 음악 평론가 박용구를 기억하다

기사승인 2017.04.09  18:4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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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구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한국공연예술사의 산 증인이다. 해방 분단의 공간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그는 평론가로, 작가로, 한국 예술계 현장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박용구는 우리 예술계에서, 전문 평론의 시대를 연 최초의 현장 음악 평론가였다. 그는 또 열악한 한국의 춤계를 옹호했던 무용평론가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평론집인 ⌜음악과 현실⌟을 비롯한 그의 평론집들은 연주자나 음악단체의 단순한 공연 기록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평문과 시평은 한국 음악계와 무용계, 나아가 한국 예술계를 진단하고 그 향방을 제시하는 방향타였다

1914년 경북 풍기에서 태어난 박용구의 비평적 글쓰기는 해방 이후인 1945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49년에 발간되어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출판금지를 당하기도 했던 평론집 ⌜음악과 현실⌟에는 새로운 민족적 음악 감수성의 필요성(아동음악교육론)과 민족음악의 방향 모색(음악유산 섭취의 문제)을 다룬 글들이 담겨있었다.

반공예술제 사건을 계기로 1950년 일본으로 밀항한 그는 1960년까지 10년간 일본에 머물렀다. 박용구는 극단 배우좌에서 연출 공부를 했고 고마끼무용단의 문예부 책임자로 일하기도 했다. 일본음악학교 졸업 후에는 <음악평론>사에 입사했다. 그의 일본 체류는 무용과 연극에 눈을 뜨고, 유명 연주가와 단체들의 공연을 보면서 세계적인 안목을 기르게 되고 , 음악 평론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 귀국한 박용구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으나 이후부터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 일간지를 중심으로, 1970년대에는 <공간><춤> 등 잡지를 중심으로 활발한 비평작업을 펼쳤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의 비평작업은 1975년 발간된 <음악의 광장>에, 그 이후의 작업은 1981년에 발간된 <음악의 문>에 수록되었다.

이 시대의 박용구의 평문은 단순한 공연 리뷰에 그치지 않고 연주단체와 음악정책, 음악과 예술에 대하 문제를 다루는 등 비교적 긴 호흡의 글들이었다. 1984년 공연예술 전문지 월간 <객석>이 창간되면서 그의 비평 작업은 <공간>과 <객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시기 그의 글쓰기는 한국 현대작곡가들의 작가론에서부터 무용교육, 종교와 무용 등 깊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박용구의 음악 평론 작업에 대해 작곡가 이건용은 “비록 중간에 10년간의 공백이 있다고 하더라도 1940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그의 50년의 평론 활동은 우리 음악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라며 “음악에 대한 언급들이 상당히 분방하고 자유로운 필치로, 때로는 대담한 직관과 상상을 따라 전개된다. 그는 논리에 입각한 비평가라기보다는 감각에 의한 비평가”라고 박용구의 비평관을 진단했다.

박용구의 무용평론은 정곡을 찌르는 어휘 선택과 예측 가능한 분석의 틀을 벗어난 의외성으로 평단을 놀라게 했다. 그는 시평과 좌담, 대담 등을 통해 무용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거침없이 토로했다. 그의 안목과 대안 제시는 때로는 압력집단으로의 역할을 수행하며 한국의 무용계 발전을 선도했다.

박용구란 이름 뒤에는 작가란 꼬리표도 따라다닌다. 극작품집 <흙비>, 장편희곡 <바리> 외에 국립발레단의 <바리공주>, 대구시립무용단의 <안은미의 춘향>, 창작 음악극 <영원한 사랑 춘향이>, 유니버설발레단의 <심청> 등 수십 편의 대본을 집필했다. 1967년에는 예그린악단의 단장으로 취임해 최초의 한국 창작 뮤지컬인 <살짜기 옵서예>를 비롯, <꽃님이 꽃님이><바다여 말하라> 등을 기획, 공연하기도 했다.

1976년에는 음악 펜클럽을 움직였고, 1973년에는 한국춤평론가회 동인으로, 88 서울올림픽 때는 개폐회식의 시나리오 집필자로 참여했다. 세계무용연맹 한국본부의 회장으로, MBC 방송문화진흥회의 이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평론가와 작가로서 박용구의 글쓰기는 예술과 문화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으며 동서고금을 망라했다. 한마디로 박학다식이었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현장 경험, 선견지명과 혜안, 그리고 배포는 실로 글로벌적이었다. 미래형 예술로 “심포닉 아트”(Symphonic Art)를 주창하고, PD를 “Produce Director”가 아닌 “Project Designer” 로 해석하고 세상을 바꾸는 시스템으로 진단했다. 문화국가론 대신에 극장국가론 이란 새로운 화두를 던지기도 했다.

“심포닉 아트”는 세분화와 다극화가 극으로 치달아온 세기말의 예술을 지양하고 예술과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둥근 북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울타리 없는 예술을 지향한다. 그는 20세기를 정리하는 시점에서, 다가오는 21세기를 “울타리 없는 회귀의 세기”로 진단하고 문화예술계의 지인들과 함께 “영고 21”이란 미래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가 90대의 나이에 접어든 2005년에 출간한 <삼별초>는 이 심포닉 아트를 표방한 약칭 심포니카란 양식을 향한 최초의 극본이었다. 박용구는 또 무당, 제갈공명, 김유신, 건축가 김수근, 디아길레프를 위대한 PD로 꼽았다. 있는 듯 없는 듯 늘 예술계 현장과 연결하며 사는, 박용구의 스케일과 예술과 인류를 향한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사례들이다.

그러고 보면 박용구는 전천후 평론가였고 총체예술론자였다. 그의 비평적 시선은 전방위를 향했고 활동 반경은 음악, 무용, 연극, 문학, 미술, 건축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했다. 펜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아니라 말로서도 그의 지성은 시대를 기록했다. 그의 시선은 날카로운 현실인식으로 무장되었고, 그 중심에는 냉철한 역사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글들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의 나이 아흔 가까이에 탈고한 <어깨동무라야 살아남는다>는 일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한 중 일이 함께 협력해야 할 당위성을 설파한 문명시평이다. 이 책을 발간한 지식산업사 김경희 대표는 “박용구의 일본 망명생활 십여 년은 본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시성사나 문화사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백남준이 “나는 중학교 시절 박용구씨의 평론집 <음악과현실>에서 박수고(拍手考)라는 글을 읽고 청중의 박수조차 통조림 음악 속에 기록화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꼈다”고 말한 것도 이 같은 사실을 방증해준다.

현장에서, “한국의 예술계에는 존경할 만한 원로가 없다”는 평론가, 예술가들의 자조적인 소리가 들릴 때, 평론가 박용구는 예외였다. 일제 식민지와 해방, 분단의 공간, 그리고 작고할 때까지, 좌우를 아우르는 폭넓은 자유주의자의 몫을 다해온 그는 그래서 “20세기 한국 비평정신의 수호자”로 일컬어진다.

예술가와 예술 현장의 이해관계에 얽혀 스스로 그 중심을 잃어버린, 전업 평론가임을 스스로 포기해버린 평론가들이 판치는 오늘날, 한국 예술계의 암울한 모습을 보면 박용구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빛난다. 그는 아직도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무장하고, 두 눈을 부릅뜨고 현장을 직시하는, “살아있는(living) 지성”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장광열_춤비평가

THE MOVE Press@ithemove.com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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