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1770년 대, 화가 마리안느는 정략 결혼을 앞 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브루타뉴 지방의 한 섬에 있는 귀족 저택을 방문한다. 중세 유럽에는 귀족끼리의 혼사때 미리 신부의 초상화를 그려서 신랑에게 보내는 관습이 있었다. 지금의 시대로 말하면 서로 상견례가 없는 상대에게 미리 신부의 사진을 보내는 경우랄까?
이런 관습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사건은 아마도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클레베의 앤 사이에 있었던 파혼 사건일 것이다. 헨리 8세의 네 번째 왕비가 되기 위해 클레베 공국에서 건너온 앤은 먼저 도착해있던 초상화에 비해 외모가 떨어진다는 핑계로 파혼을 당했다. 이 초상화를 그려준 화가는 그 유명한 한스 홀바인.
스스로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으나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만 하는 귀족 가문의 딸 엘로이즈.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듯 보이나 자신의 작품을 아버지 이름으로만 내놓아야했던 처지의 여성 화가 마리안느. 하녀의 신분에 원치 않는 임신으로 낙태를 해야만 할 처지에 놓여있던 소피. 신분과 처지가 다른 세 명의 여성은 함께 생활하는 동안 점점 서로에게 연결되며 끈끈한 연대 의식을 갖게 된다. 아울러 두 주인공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사이엔 어느덧 사랑이 시작되고 점점 깊어지는 관계로 나아간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2019년 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페미니즘 영화이면서 퀴어 영화다. 이제껏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는 남성 위주로 쓰여진 역사였고,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시대는 여성의 권리와 자유가 제한 받던 시대였다. 그 시대를 살아갔던 여성 예술가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던 셀린 시아마 감독은 적절한 실제 인물을 역사 속에서 찾아 시나리오를 쓰려고 했지만, 극히 소수의 여성 화가 밖에 찾을 수 없어서 포기하고 결국 가상의 인물로 시나리오를 썼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를 감동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름다운 쇼트들이다.. 자연광을 최대한 사용한 조명과 잘 계산되어 배치된 미장센들이 만들어낸 쇼트들은 마치 서양 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실내에서 촛불과 화롯불을 이용해 찍은 쇼트들의 은은하고 우아하며 따스한 느낌에서는 부셰의 그림을 떠올리게 된다. 특히 마지막 날 밤, 둥근 거울을 통해 스스로의 누드화를 그리는 쇼트는 명백히 벨라스케스의 작품 <거울 속의 비너스>를 가져온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두 사람의 초상화 작업이 진행되는 시간만큼이나 두 사람의 교감도 더욱 깊어간다.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말한다.
"우리는 동등해요."
이 말은 사랑하는 관계는 동등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시선의 동등함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대개의 경우 화가가 관찰자이고 모델은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엘로이즈는 모델도 화가를 '본다'고 말한다.
존 버거는 그의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보는 행위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결정해준다."며 "시각의 상호 작용적 성격은 대화의 상호작용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남성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림에 등장하지만, 여성은 그림의 소유자에게 보여지기 위해서만 그림에 등장한다'고 말한다. 서양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규정되어 왔던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말하고 는 것이다. 이 영화는 보는 이의 시선과 보여지는 이의 시선에 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존 버거는 또 다른 책 <본다는 것의 의미>에서는 "기억이라는 것은 어떤 구원의 행위임을 함축하고 있다. 기억이 되고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것으로부터 구제되어 온 것이다. 잊혀지고 있는 것은 버림을 받아온 것이다."라고 말한다.
'기억'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다. 영화 속 세 여성의 대화 중에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이야기가 나온다. 지옥 출구에서 왜 오르페오가 뒤를 돌아봤느냐는 엘로이즈의 질문에 마리안느는 "예술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하나, 엘로이즈는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엘로이즈와의 초상화 작업을 통해서 마리안느는 더욱 성숙해지는 느낌이다. 정신적으로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새로운 눈을 뜨기 시작하는 듯 하다. 관습적으로 그림을 그렸던 마리안느는 비로소 대상과 교감하며 그것을 그림에 투영하는 법을 터득해 간다.
이 영화를 보는 즐거움 중 하나는 마리안느의 시대에 전통적으로 작업되던 유화와 크로키등의 제작 과정을 살짝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마리안느의 그림들은 모두 화가 엘렌 델마르의 작품이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붓을 든 손의 클로즈업 장면은 모두 델마르의 손이다.
또 하나의 즐거움이라면, 초기 다성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짝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전환점이라 할 모닥불 장면에서 마을 여성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바로크 시대의 대위법에서도 자주 사용되던 카논 양식을 만들어가는 방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사용된 노래 'La Jeune Fille en Feu' 는 원래 전래되어 오던 민요 멜로디에 가사를 바꾼 것이다. 처음에는 원형에 가까운 단순한 형태로 사용하려 했으나 시아마 감독이 좀 더 현대적인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장 밥티스트 드 로비에, 아서 시모니니는 리게티의 레퀴엠중 'Kyrie'의 느낌을 차용해 완성시킨 것이라고 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시대는 바로크가 저물고 나타난 로코코의 시대였고, 음악적으로는 갈랑 양식의 시대였다. 아직은 귀족들의 시대였고, 새로운 시대는 도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대한 물결이 곧 밀어닥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불과 몇 년 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저택 한 켠에서 발견한, 천을 뒤집어 쓴 채 놓여있던 물건은 클라브생이었다. 클라브생은 바로크 시대를 주름잡았던 건반 악기이지만, 이제 서서히 피아노라는 새로운 악기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마리안느는 오랫동안 사용 안 했을 것 같은 클라브생 앞에 앉아 어색하게나마 연주를 시작 한다. 기악곡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엘로이즈를 위해서였다. 건반 악기 하나로 비발디의 <사계>중 ‘여름’을 연주를 하는 동안에 마리안느는 언어를 사용해서 지금 연주중인 음악을 엘로이즈에게 설명한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말하는' 음악이었고 수사학의 음악이었다.
이 비발디의 '여름'은 클라브생의 단순하고 소박한 소리로만 연주되며 영화에 처음 등장하지만,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는 원형대로 오케스트라에 의해 확장되어 연주된다. 사람의 관계가 처음에는 수줍고 조심스럽지만 시간이 쌓이고 마음이 쌓이면 보다 깊어지고 풍성해지듯이.
그 깊어지고 풍성해짐에 꼭 행복한 순간들만 있었을까?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별이었지만, 그 두 사람의 마음은 언제까지나 연결되어 있었을 거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렇게 단절도 관계를 깊게 하고, 아픔과 슬픔도 그 관계의 시간들을 풍성하게 ‘기억’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음악을 들을 때 마다 특정한 시간의 추억을 소환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이게 음악이라는 예술이 갖는 매력이 아닐까 싶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도 그랬을 것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의도적으로 많은 이들이 잘 아는 이 음악을 골랐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를 '기억'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두 여인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들이 살아냈던 시대 또한 잊지 않고 ‘기억’해낸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요한 애니메이션 감독 themove99@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