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발레단 <한여름 밤의 꿈>
나는 당신을 느낀다. 마치.... 공기 중의 숨결처럼,
그리고 빛 속에서.... 추억 혹은 꿈처럼.
무언가의 징조로, 어딘가에 대한 희망으로....
슈만의 담담한 피아노 콘체르토 선율이 흐를 때, 사랑의 이야기는 욕망의 절정을 지나 상실과 새로운 발견을 향해간다. 셰익스피어는 이 우주에서 사랑이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하고 순간적으로 변할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쏟아지는 빗속에 굴절된 마음이 씻겨나가면 또 다른 욕망의 여정이 새로운 길을 열어줄까?
신생 발레단으로 탄생한 서울시발레단이 창단 공연으로 올린 작품은 주재만 안무의 <한 여름밤의 꿈>(8.23-25)으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를 적절히 활용한 화려한 영상의 2막 7장의 드라마틱한 모던발레극을 펼쳐 보였다. 셰익스피어 원작은 기본 모티프만 차용했을 뿐 스토리와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변덕스럽고 불완전한 사랑의 본질에 관한 테마로 이끌어간다. 셰익스피어는 <한여름 밤의 꿈>에서 사랑의 변덕스러움과 진실한 사랑의 승리를 그리는데, 안무가 주재만은 자신만의 비전과 상상력을 발휘해 트위스트된 꿈을 그린다. 원작에 나오는 요정 퍽(PUCK)의 눈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감정과 연결하며 춤을 통해 꿈과 사랑 이야기를 전한다.
꿈과 환상여행은 인간의 복잡한 감정의 여정으로 전개된다.
슈만의 피아노에 듀엣 남녀 연인의 세레나데는 슬픔과 사랑이 담기고, 군무의 다양한 표정들 속에 삶과 죽음의 순간들이 교차한다.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 사이 퍽의 솔로 춤은 쓸쓸하고 외롭다. 그 여정에는 비가 쏟아지고, 숲속에서는 붉은 생명의 나무가 자란다. 우주의 배경인 숲은 현실과 환상이 혼재하는 공간으로 환상과 연결된 감정을 표현한다.
1막에서 슈만의 가곡 ‘시인의 사랑 Dichterliebe, Op.48’ 아리아가 울릴 때, 꿈 속에서 떠난 연인을 보고 잠에서 깨어나 서럽게 울면서 울부짖는 노래(Ich will meine Seele tauchen 나의 영혼을 깊이 적시리라)가 흘러나올 때, 무너지는 남자(솔로)의 춤은 “비여 내 영혼의 고통을 씻겨주오”라며 절규한다.
멘델스존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읽고 특유의 환상적이며 괴이한 시(詩)적 여운에 감흥을 느껴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을 작곡했다고 한다. 대개 <한여름 밤의 꿈>에 멘델스존의 음악을 쓰게 되는데, 주재만은 이번 무대에서 연출과 안무를 맡으며 멘델스존의 음악 대신 슈만과 필립 다니엘(피아니스트, 영화음악 작곡가)의 음악을 사용했다. 필립 다니엘의 음악은 1막 4장 <미드나잇 드라이브>의 상처받은 인간들의 군무에서도 공허와 분노와 슬픔이 뒤범벅된 감정을 연주한다.
1막 1장 시작부터 군무로 시작한 무대는 마지막 2막 2장까지 군무로 끝을 맺는다. 서두의 욕망의 분출은 빛과 그림자 속에 드러내기도 하고 숨기도 하며 불안정한 사랑의 형태를 퍽의 대사를 이미지화한 다각도의 움직임으로 보여준다.
“나는 지구 주위에 띠를 둘 것이다. 40분 안에...” 퍽이 꽃즙을 준비하는 장면을 연상케하는 동작들은 어떻게 사랑이 쉽게 움직일 수 있는지, 때로는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불안한 감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이네의 싯구로 노래하는 ‘시인의 사랑’ 노래는 눈부신 오월에 처음 사랑을 만난 순간부터 분출하는 사랑이 꽃 피우며 눈물로, 한숨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임을 거대한 깃털처럼 허약한 심장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월에
모든 싹들이 피어나는 때
그때 나의 마음속에서 사랑이 솟아올랐네
수많은 꽃들이 피어나네
모든 새들이 노래하는 때
그때 나 그녀에게 고백했네
나의 동경과 열망을
나의 눈물로부터 피어나네
수많은 꽃들이 피어나네
나의 한숨으로부터 우러나네
_ Dichterliebe op.48
사랑은 예측 불가능하고 순간적으로 변할 수 있는 변덕스러운 감정이다. 한여름 밤의 꿈에서 보여지는 사랑의 이미지들은 다양한 문학작품 속 주인공들의 내면과 흡사하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변한다. 시간이 갈수록 사그라들고, 오직 나만의 상념에...” 로버트 프로스트의 ‘미완성 사랑의 시’에서는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았습니다. 사랑은 시간이 서로서로 뭔가 다른 것이었습니다..” 라고 말한다.
공허한 아리아가 격렬한 음성으로 울릴 때, 상처 입은 영혼들은 지난 일을 추억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또 다른 사랑의 여정에 오른다. 별이 빛나는 밤을 지나 여명이 밝아올 때, 푸른바다 수면 위로 필립 다니엘의 피아노와 함께 장엄한 군무로 막을 내린다.
아, 그곳으로 갈 수만 있다면
내 맘이 기쁠 수 있다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면
아, 저 환희의 나라
종종 꿈에서 보았지
하지만 아침햇살이 다가오면
그저 거품으로 흩어져 버리네
사진 제공_서울시발레단
임효정 (공연칼럼니스트)
임효정 기자 Press@ithemov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