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허명현의 감성회로 찾기] 리뷰_삶과 죽음의 이중주

기사승인 2017.07.19  02:05:45

공유
default_news_ad2

-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 202회 정기공연

 

윤이상 작곡가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올 한해 국내 외 많은 단체에서 윤이상 작곡가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특히 지난 7월 14일 예술의 전당에서는 보기 드문 기회로 윤이상 작곡가의 '화염속의 천사' 가 최수열 지휘, 코리안심포니의 연주로 연주되었다. 이 작품은 윤이상이 1994년 죽음을 목전에 둔 마지막 작품이며, 민주화 운동 당시 시위과정에서 분신한 학생들을 추모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날의 첫 곡인 ‘화염속의 천사’ 는 우선 전면에 드러나는 타악기 이외에도, 목관과 금관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목관과 금관을 두 축으로 하여 전체적인 이미지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 현대시대에 걸쳐진 곡인만큼 연주자에게도 아주 까다로운 테크닉을 요구하고 있다. 목관은 중반부 이후 호흡이 다소 불안정해져 끊어 내는듯한 리듬 효과가 희석되었으며, 호른 역시 음을 매끄럽게 전환하지 못해 윤이상이 의도했던 음향 축조에 실패한 부분도 종종 보였다. 하지만 크게 흔들리지 않는 앙상블의 모습들이 보여 이들의 고된 훈련의 흔적들이 느껴졌다.

이날 독특하게도 하프는 지휘자 기준으로 가장 오른쪽 끝 편에 배치되었다. 하프는 천사를 대변하는데, 가녀린 존재의 외로움을 극대화하는데 이 배치가 아주 적절하였다. 하프의 노래 이후, 거대한 화염을 연상시키는 금관의 일렁임과 그 사이를 뚫고 나오는 타악기들의 소리가 폭력적이었다. 가녀린 하프와 대비되어 그 효과가 배가되었다. 그리고 한 영혼의 비명소리를 연상시키는 처절한 고음부의 목관을 거대한 화염들이 잔인하게 짓누른다. 팀파니를 비롯해 무대의 양쪽으로 배치된 타악기군은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거대한 움직임과 리듬을 만들어가며, 곡에 긴장감을 얹어 클라이막스로 향해갔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여려지는 하프의 진행을 끝으로, 육체가 사라지듯 모든 음은 비로소 소멸한다.

 

후반부의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변용’ 에서도 1부와 마찬가지로, 곡 자체의 어려운 난이도로 목관과 금관이 서로 잘 섞이지 못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특히 플룻이 지나치게 날을 세워 등장해, 전체적인 밸런스를 무너트려 다른 악기로부터 주위를 분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대목들은 눈에 띄었다. 특히 중반부 이후, 고통의 주제와 행복을 회상하는 주제의 대립이 의도적으로 신경을 쓴 듯 명확했다. 삶과 죽음이 서로를 마주보며, 한 개인에게 다가온 죽음의 모습을 처절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분위기를 바꾸는 거대한 탐탐 소리와 함께, 변용의 주제가 시작되는데 현악기들이 음을 서서히 상승 시켜가며 눈부신 노을빛 폭포를 뿜어냈다. 이 찬란한 색채 뒤로 비록 음량은 작았으나, 금관이 실수 없이 정화의 주제를 연주하며 승천하는 천사를 그려냈다.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탐미적인 죽음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장대한 광경 앞에 호른과 트럼펫의 불안한 음정은 사소하게 느껴졌다.

 

이날 공연의 흥미로운 점은 윤이상의 '화염속의 천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변용'이 서로 다른 죽음관을 보였다는 것이다. 각 작곡가들은 죽음에 대해 서로 다른 관념을 지니고 있다. 우선 윤이상은 생전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가 작곡한 <바라>, <나모> 등은 불교적 색채가 강한 작품들이며, 작곡가 윤이상의 장례식 또한 불교식으로 이루어졌을 만큼 불교 사상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다. 이 날 ‘화염속의 천사’ 뒤에 원래 연주되었어야할 에필로그까지 모두 연주되지는 않아서, ‘화염속의 천사’에서 말하는 불교사상에 입각한 죽음의 관념이 명확하게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건, 윤이상이 말하는 한 개인의 죽음은 윤회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거대한 차원의 ‘영원’은 끝없이 지속된다. 그리고 영원속의 개인은 불꽃이 사라지듯 끊임없이 소멸하고 정화되며, 다시 탄생한다. 이전 촛대에서 또 다른 촛대로 자연스럽게 불꽃이 이동해, 또 다른 삶을 시작하며 다시 초를 불태우는 것이다. 반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가까운 죽음관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죽음과 변용’ 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죽음 후 찾아오는 건 유토피아에 가까운 불멸의 안식처이다.

연주하기 몹시 까다로운 두 곡을 연주하면서, 기술적인 부분에서의 곡의 완성도가 다소 떨어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결국 기획이 승리한 공연이었다.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작곡가들의 서로 다른 생각을 음악으로써 접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획이었다. 최수열 지휘자가 기획한 테마가 있는 공연은 다른 단체들에 귀감이 될 만하다. 이날 윤이상의 곡이 끝나고 최수열 지휘자는 윤이상 작곡가의 악보를 들어 올리며 모든 영광을 윤이상 작곡가에게 돌렸지만, 죽음에 관해 오랜 시간 고찰한 최수열 지휘자의 깊은 고민 역시 고스란히 느껴지는 무대였다.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

 

THE MOVE Press@ithemove.com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