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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정전(正典)의 아름다움을 비교하다

기사승인 2018.05.06  13: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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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발레단의 VS 유니버설발레단

 

국립발레단 <지젤>
유니버설발레단 <지젤>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이 지난 달 <지젤>로 본격적인 시즌을 시작했다. 국립발레단은 2018년 시즌의 문을 여는 첫 공연으로(3.21-25), 유니버설발레단은 지난 3월 ‘스페셜 갈라’로 좀 더 일찍 시즌을 시작하며 올해의 첫 전막 발레로 <지젤>(4.6-15)을 선택했다. 두 발레단이 나란히 <지젤>을 올린 것은 2011년 이후 처음인데, 당시 국립발레단은 파트리스 바르 안무의 <지젤>을 초연했고, 유니버설발레단은 그해 처음 시작된 대한민국발레축제 참가작으로 <지젤>을 선보였다. 2015년에도 두 단체가 정기공연 프로그래밍에 <지젤>을 넣은 바 있지만 이때 유니버설발레단이 공연한 작품은 그램 머피가 안무한 컨템포러리 버전으로,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같은 작품으로 두 발레단의 역량과 매력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는 처음이라 하겠다. 국립발레단은 3월 21일부터 25일까지 5일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유니버설발레단은 4월 6일부터 15일까지 7일간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각각 6회와 9회에 걸쳐 관객들을 만났다.

 

국립발레단 <지젤>
유니버설발레단 <지젤>

 

<지젤>, 낭만발레 속에 숨은 계급 간 갈등과 젠더의 발현

<지젤>이 파리오페라발레단에 의해 초연된 것은 1841년으로, 이때가 1830년의 7월 혁명과 1848년의 2월 혁명 사이에서 산업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부상이 본격화되던 시기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830년 샤를 10세가 시민들의 손에 끌어내려지고 루이 필립 1세가 입헌군주로 추대되고 나서 국가, 즉 왕이 소유하고 있던 오페라극장에도 국가의 후원을 받으며 민간에서 경영하는 방식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주로 귀족으로 이루어져 있던 관객층에도 금전적 여유가 생긴 부르주아 계층이 대거 유입되었다. <지젤> 1막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이러한 사회 변화와 연관지어 이해해야 한다.

<지젤>의 배경은 독일의 시골마을이지만 극의 내러티브에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첨예한 계급 갈등이 스며들어 있다. 1막에서 신분을 속이고 접근한 귀족의 비밀이 밝혀지자 그와 결혼할 희망으로 부풀어 있던 시골처녀는 충격으로 죽음에 이른다. 지젤의 죽음은 단순히 좌절된 결혼이라는 개인적인 비극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비극을 통해 사회적 장벽으로 존재하는 계급구조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비극으로 발전한다.

1막의 주된 기조가 계급 간의 갈등이라면 2막은 젠더(Gender)간의 갈등이 중심에 놓인다. 결혼 전날 예비 남편에게 버림받고 목숨을 잃은 여성들은 ‘윌리’라는 처녀귀신이 되어 숲을 배회하는데, 여기서 밤의 숲이라는 공간은 윌리 들이 숲에 발을 들인 남성들의 목숨을 취하는 복수의 무대가 된다. 낭만주의 발레에 이르러 비로소 극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게 된 여성 무용수들은 남성 무용수의 보조 역할이 아닌 자신만의 동기와 움직임과 해석으로 배역을 소화하기 시작했고 이는 비단 가련함과 아름다움과 젊음을 가진 주인공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같은 동기를 가진 여성 공동체인 윌리 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남성들을 처단한다. 그들에게 목숨을 잃는 희생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존재 그 자체로 심판을 당한다.

지젤은 작품 내에서 사회가 정한 규범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1막에서 지젤은 계급사회가 그녀에게 허락하는 결혼, 즉 힐라리온의 구애를 마다하고 귀족 알브레히트와의 결혼을 꿈꾸다 죽음을 맞이하며, 2막에서는 숲에 들어온 남성을 춤추게 해 목숨을 취해야 하는 윌리들의 규율에 맞서 알브레히트와 함께 춤추고 그의 목숨을 구한다. 1막에서 지젤의 도전은 패배로 끝나고 그 결과 목숨을 잃게 되지만 2막에서 그녀는 승리한다. 지젤의 승리로 알브레히트는 목숨을 잃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지젤을 패배시키거나 승리하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은 사랑이다. 지젤은 농민 계급이지만 그녀의 운명은 전적으로 자신의 결정에 의한 것이다. 이 결정에는 알브레히트를 사랑한 것과 그의 목숨을 구한 것 모두가 해당되며, 고티에의 원래 대본에서는 지젤이 알브레히트의 검으로 자결하고 2막에서 무덤으로 돌아가기 전 알브레히트를 향해 바틸드와 결혼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젤>보다 10여 년 전에 발표되어 낭만주의 발레의 기틀을 마련한 <라 실피드>에서 주인공들의 운명이 마녀의 점괘에 의해 정해지는 것과 달리, 주인공의 이름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지젤>에서 주인공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 스스로의 결정이다.

국립발레단 <지젤>
국립발레단 <지젤>

 

프랑스적인 섬세함과 러시아적인 엄격함- 바르의 <지젤> vs 프티파의 <지젤>

국립발레단의 <지젤>은 1975년 임성남 안무작으로 처음 공연한 뒤 1999년에는 마리나 콘드라체바 버전을 새롭게 선보였고, 2002년 공연 이후 10년 가까이 올리지 않다가 2011년에 파리오페라발레단 부예술감독인 파트리스 바르가 안무한 파리오페라발레단 버전을 초연하며 <지젤>이 다시 발레단 레퍼토리로 공연되기 시작했다. 바르 안무의 <지젤>은 국내 초연 이듬해인 2012년, 2013년, 2015년에 이어 올해 다섯 번째로 공연되었는데, 그만큼 자주 공연되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버전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김지영과 박슬기라는 기존 주역들 외에 김리회와 한나래가 지젤 데뷔 무대를 치렀고, 김지영과 박슬기의 파트너를 맡은 박종석과 허서명이 알브레히트로 데뷔하며 관객들 앞에 새로운 파트너십을 선보였다.

 

유니버설발레단에서는 1985년 초연부터 마리우스 프티파가 안무한 마린스키 버전의 <지젤>을 계속해서 무대에 올리고 있다. 정기공연마다 발레단 주역무용수 외 스타 게스트의 초청으로 관객들을 놀라게 해온 유니버설발레단은 이번에도 영국 로열발레단 수석무용수 출신 매튜 골딩과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의 김기민과 예카테리나 오스몰키나를 초청해 화제를 모았고, 기존 주역인 강미선 외에 수석무용수로 승급한 홍향기와 얼마 전 입단한 외국인 주역들인 조이 워막, 나탈리아 쿠쉬가 지젤로, 이현준, 이동탁,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마밍이 알브레히트로 분해 각자의 매력을 펼쳐 보였다.

덕분에 관객들은 같은 작품을 다른 버전으로 감상하는 한편 무용수들의 서로 다른 매력과 개성을 경합하는 무대를 비교하며 보게 되어 관극의 즐거움이 더욱 배가되었다. 바르 버전은 무용수들에게 화려한 테크닉 못지않게 등장인물들 간의 복잡한 관계와 세밀한 감정선에 따른 섬세한 연기를 요구해 극적인 전달력을 높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막에서 알브레히트를 사이에 두고 연적 관계인 지젤과 바틸드가 이복 자매라는 한 겹의 설정이 더 있다거나, 지젤이 바틸드에게 받은 목걸이를 알브레히트에게 자랑할 때 알브레히트는 그것이 바틸드의 것임을 알아보고 불안에 잠긴다거나, 바틸드에게 알브레히트가 자신의 약혼자라고 말하는 지젤 뒤에 서서 바틸드를 향해 알브레히트가 자신을 모른 척해달라고 신호를 보낸다거나 하는 식으로 드라마의 밀도가 높아져 관객들의 몰입도를 고조시킨다. 2006년 80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당시 최연소 단원으로 국립발레단에 입단하며 일찍부터 주역의 기회를 잡았던 김리회는 발레단의 인기를 견인한 김지영과 김주원이라는 두 주역무용수의 쌍두마차 체제 이후 박슬기와 이은원이라는 새로운 주역들과 트로이카 체제를 형성했으나 이상하게도 지젤과는 오래도록 인연이 닿지 않았다. 이번 공연에서 입단 12년 만에 서른이 넘어 지젤로 데뷔한 김리회는 그동안의 아쉬움을 털어내려는 듯 테크닉과 연기 모두에서 흠잡을 곳 없는 무대를 선보이며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금 증명했다. 김지영의 노련함, 김리회의 깊이, 박슬기의 섬세함이 각각의 매력으로 무대를 채웠고 솔리스트로 지난해 <안나 카레니나>에 이어 <지젤>에서도 다시 주역을 꿰찬 한나래의 깨끗한 테크닉과 연기 역시 관객들 앞에 인상적인 눈도장을 찍었다.

바르 버전 <지젤>이 프랑스적인 섬세함을 특징으로 한다면 유니버설발레단이 선보인 프티파의 <지젤>은 다분히 러시아적이다. 러시아 발레 특유의 엄격함과 화려함이 있는 대신 인물 간의 감정선은 다소 투박하다. 1막에서 알브레히트는 사냥꾼 복색의 자신을 발견하고 의아해하는 바틸드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고, 지젤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밝히려 하는 바틸드를 말리기보다 침통해하며 받아들인다. 지젤이 바틸드에게 받은 목걸이를 알브레히트에게 보여주지 않으니 알브레히트가 곧 다가올 삼자대면을 불안해할 이유도 없다. 1막의 갈등이 단조로워진 대신 6인무로 확장된 패전트의 춤이 포도 수확철의 수선스러운 활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여섯 커플을 주역으로 내세워 관객들의 선택지를 다양화한 캐스팅은 커플마다 각기 다른 매력을 자랑하며 눈길을 붙잡았다. 지젤 강미선과 알브레히트 이동탁, 힐라리온 알렉스 세이트칼리예프 세 무용수의 조합은 연기력 출중한 무용수들의 만남답게 1막의 드라마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고, 강미선은 실제 부부 사이이기도 한 콘스탄틴 노보셀로프와 밀도 높은 호흡을, 홍향기는 깔끔한 테크닉으로 깊이와 품위를 겸비한 이현준의 연기와 조화로움을 보여주었다. 나탈리아 쿠쉬와 예카테리나 오스몰키나가 쓰러질 듯 연약한 지젤로 비슷한 해석을 보여준 데 비해 그 파트너들의 해석이 다른 것도 관전 포인트라 할 만했다. 관록 있는 연기로 무대를 장악한 매튜 골딩과 달리 김기민은 예기치 못한 파국 앞에서 서툴렀던 감정을 후회하는 청년의 내면을 드러냈는데, 그가 자신의 시그니처가 된 발롱을 선보일 때마다 객석에서 열렬한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볼쇼이발레단 버전과 마린스키발레단 버전의 러시아 레퍼토리들을 기본으로 작품의 다양화와 현대화를 꾀하고 있는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의 행보는 비슷한 듯 다르다. 국립발레단은 강수진 예술감독의 취임 이후 그가 무용수로 활동하던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레퍼토리 위주로 들여오고 있고, 유니버설발레단은 <심청>에 이은 <춘향>을 꾸준히 다듬어 무대에 올리며 한국적 소재의 창작발레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디스 이즈 모던>을 통해 컨템포러리 발레를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이번 공연의 <지젤>처럼 비슷한 시기에 같은 작품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도 계속 있으리라 장담하기 어렵다. 두 발레단에서도 발레 관객이 많지 않은 공연시장에서 이번과 같은 공연이 안 그래도 작은 파이를 더 잘게 나눠야 하는 마이너스 전략인지 작은 파이를 더 크게 키울 수 있는 플러스 전략인지 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셈의 결과가 후자로 나와 이렇게 같은 작품을 요모조모 비교하며 두 배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도 자주 있기를 바란다. 선의의 경쟁은 서로에게 발전적인 자극을 주는 법이니까. 아직 쌀쌀한 봄날,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글 윤단우 (작가/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 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

 

 

 

THE MOVE Press@ithemo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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