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면을 채워 자신을 움직이게 한다" _
‘2020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은 전염병 대유행이라는 엄중한 상황에도 역량 있는 안무가를 발굴하여 국제무대에 알리려는 현대무용진흥회의 의지와 노력으로 29회째를 맞이했다. 그동안 안애순, 이인수, 김보라, 김재덕 등 현대무용가 뿐만 아니라 김진아, 김재승, 변재범 등 한국창작무용가들까지 해외 무대에 진출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하여 대한민국 무용의 위상을 높이고, 국제교류에도 앞장서고 있다. 2020년 12월 5일에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시작된 ‘2020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은 전혀 예견하지 못한 ‘전염병의 대유행’으로 인하여 취소되거나 축소되어 무대를 잃은 무용가들은 소중한 기회에 진정성 있는 작품으로 화답하였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방역을 위한 거리 두기로 많은 관객과 현장에서 감동의 순간을 공유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2020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 첫 무대는 권재헌의 <Empty/공허한>였다. 2017년 코리아국제현대무용콩쿠르에서 대상을 수상한 권재헌은 움직임만 뛰어난 무용수가 아니라 추상적인 작품의 내용을 구체화 시키는 능력을 지닌 신진안무가이다.
‘내면은 차가우며 뜨겁고, 손으로는 잡을 수 없는 무수한 연기로 채워 나를 움직인다. 차가움은 발화했으며 뜨거움은 증발했다.’는 다소 모호한 내용을 영리하고 교묘하게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하였다. 독일의 표현주의와 극소주의(Minimalism), 그리고 개성적인 움직임으로 기막힌 프레이징(Phrasing/어법)을 통해 관객의 시선을 끄는 권재헌은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많은 유망주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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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넘어 인간의 내면의 세계는? "
Q. ‘2020년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에서 공연했던 <Empty>는 무척 신선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먼저 마술 도구를 활용하여 연기(smoke)를 가면 뒤에서 적재적소에 필요한 만큼 내뿜을 때 무척 흥미로웠지만, 작품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공연을 관람하고 작품 내용을 살펴봤더니 ‘내면을 채워 자신을 움직이게 한다.’라는 다소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활용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한정된 공간에 무엇인가를 채우면 그만큼 ‘덜어내야 하거나, 넘칠 것’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뿜어내는 한숨 같은 공허는 허공으로 하얗게 사라지며 작품의 이미지는 강화되고, 일상의 평범함이 작가를 통해 전혀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다소 시간이 지났지만, 작품을 구상하게 된 동기나 이미지를 강화하기 수단, 안무 의도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 작품 <Enpty>의 동기는 남들에게 맞춰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무대에서 이미지화하고 싶은 욕심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행동하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그 시선에서 자유롭기 위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만든 가면을 쓰고 남들이 원하는 말 그리고 원하는 행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만약 남들이 원하는 모습의 가면을 벗겨내고 나의 내면을 더 집중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하는 궁금함으로 작품을 안무하게 되었습니다. 작품에서 오브제(objet)가 된 연기는 사라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연기의 속성은 가면 뒤에 숨은 내면의 감정들이 타인의 시선을 대하는 모습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안의 내면들은 차갑고 뜨거울 정도로 다양합니다. 차가운 것은 한기를 내뿜고 뜨거운 것은 열기는 내뿜습니다. 만약에 그것들이 무수한 연기로 변해 자신의 몸을 공기인형처럼 만들고 그런 공기인형의 움직임이 타인을 위한 움직임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연기라는 트릭(trick)을 선택했습니다.
- 삶에 있어서 유년기(幼年期/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에 해당하는 시기)는 성격발달에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랐는지 궁금합니다.
: 노는 것을 좋아하고 책상에 앉아있기 싫었던 저를 일찍이 알아보신 부모님은 저에게 다양한 예술 감각을 길러주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미술과 음악 등등 다양한 레슨을 받았고, 그중에서 음악적 감각을 많이 기르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대중가요보다는 클래식을 더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보다 상대적으로 공연과 전시회가 적었던 대전에서부터 저를 위해 자주 서울로 와서 다양한 공연과 전시회를 관람하게 해주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이 ‘인체의 신비전’, ‘오페라의 유령’이 있습니다.
- 무용은 언제부터 시작하게 되었고, 계기는 무엇입니까?
: 무용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대전예술고등학교의 입시설명회에 참가하면서부터입니다. 원래 스트릿 댄스를 추고 있었고, 공부보다는 몸을 사용하는 운동이나 예체능 쪽으로 꿈을 가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춤을 추고 있다는 걸 아신 담임선생님이 ‘예고에서 입시설명회가 있으니 한번 들어 보라’라는 말과 함께 담임선생님 추천으로 그 입시설명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현대무용이라는 장르의 춤을 선배의 스마트폰을 통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기억해 보면 자신들의 무용경연대회 작품 영상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화려한 기교, 빠른 박자의 춤, 근사해 보이는 음악은 저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습니다. 부모님께 먼저 찾아가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했고, 학교에서 진행되는 시험과 면접을 통과하여 대전예술고등학교에 입학과 동시에 저의 무용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권재헌_ tool _ photo by 옥상훈 |
- 학생들과 진로 상담을 위해 만나서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잘할 수 있는지?’ 물어보면
다수가 답변을 망설입니다. 필자는 춤을 출 수 있다는 것과 춤 언저리에 머물고, 그것과
관련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항상 안도하며 행복해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평생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권재현 님은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뭘 잘
할 수 있는지? 또 그것을 언제 깨달았는지 궁금합니다.
: 저는 상상력이라는 무한한 힘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모든 창작활동을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운이 좋게 무용을 선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운이 좋다는 이유는 무용이 복합적인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입니다. 음악, 미술, 공간 그리고 움직임까지 모든 것을 소중하고 중요하게 여기게 하는 것들의 집약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중한 것들을 좋아하고 자연스럽게 곁에 둠으로써 조금씩 발전하고 성장하는 중입니다. 그동안의 발전과 성장을 위한 학습과 노력을 통하여 저만의 색깔이 담긴 창작물을 만들고, 무대에서 보여줌으로써 주변에 인정을 받게 된 것 같습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그렇게나마 제가 무엇을 잘하는지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 아버지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힘들고 지칠 때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의 힘듦을 하소연하고 싶어지는데, 아버지를 생각하면 힘이 생기고 용기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게 원동력으로 바뀌는 것 같습니다.
- 자신의 좌우명이나 지침서가 될 만큼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 프랑스 68혁명 때 나온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입니다.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 준다면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이루는 데에 큰 영향력을 가지며, 그들의 아이디어나 비전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상상력과 창의성이 혁신과 발전의 열쇠이며, 이러한 열쇠를 가진 사람들은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 그동안 작업에 대한 평가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 저의 작업물에선 항상 오브제가 등장합니다. 그중 2021년 젊은 안무자 창작공연에서 안무한 작품(TOOL)에서는 철제테이블을 이용하여 무용수들을 도구화시켰습니다. 오브제의 사용은 작품의 상징성과 다양한 표현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며 작품의 심미적 표현을 풍부하게 만들어줍니다. 오브제를 등장시키겠다는 결단을 내리면 그 오브제를 어떻게 사용해야 1차원적이지 않고 좋은 표현과 효과적인 그림을 만들 수 있는지 고심합니다. 고심을 통해 작품을 구성하였고 주변에서는 저에게 오브제를 효과적이고 필요에 맞게 활용을 한다는 평가를 해주셨습니다.
- 자신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지?
: ‘즐기는 사람보단 준비된 사람이 되자’입니다. 그 이유는 저의 장점에서 나옵니다. 저의 장점은 항상 남들에게 완벽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주변에선 성실하고 자기관리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못난 모습을 보여주기 싫으니 제가 못하는 것은 남들 앞에선 시도를 안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단점을 고치기 위해 혼자서 개인 연습과 공부를 통해 제가 못하는 것을 잘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합니다.
폴란드 공연 리허설 중 |
홍콩 워크샵 중 |
- 그동안 무용가로서 지침이 되거나 영향을 준 예술가나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주시고, 어떤 무용가(안무가)가 되고 싶으신지 말씀해주세요.
: 같은 학교 선배이자 선생님인 전혁진 선생님입니다. 저는 작품에서 중요하게 보는 것이 움직임보다는 작품을 구성하는 미장센(mise en scene/무대에 오른 등장인물의 배치나 동작, 무대 장치, 조명 따위에 관한 총체적인 설계)과 작품의 흐름인 것 같습니다. 그런 취향을 가진 저에게 많은 영감은 준 전혁진 선생님의 작품 <소멸>은 움직임이 주된 작품이 아닙니다. 작품에 내포된 의미를 사진 촬영 행위와 그 촬영된 피사체를 담은 사진을 통해 다양한 의미와 출연자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제시하고 같이 느끼게 해줍니다.
요즘엔 안무가라는 칭호보다는 연출가라는 칭호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옛날에 봤던 무용작품들은 움직임으로 많이 풀어냈지만, 최근에 발표되는 몇몇 작품들은 ‘무용작품인가?’ 할 정도로 움직임이 적어지고, 다양한 어법뿐만 아니라 연극 연출 요소도 많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기술이 급진하면서 공연예술의 장르 간 경계선이 모호해졌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것을 포용하고, 수용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수용한 것들을 저만의 색으로 채색하여 복합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 마지막으로 권재현 님에게 ‘무용’이란?
: 저를 존재하게 만들어 준 예술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물은 존재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그 이유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무용을 함으로써 저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권재헌 |
권재헌
한양대학교 무용학과 졸업
한양대학교 무용학과 석사과정
한양대학교 실기 강사
부산예술고등학교 실기 강사
[수상]
2016 동아무용콩쿠르 일반부 금상
2017 코리아국제현대무용콩쿠르 전체 대상·일반부 금상
2021 젊은안무자창작공연 우수안무자상 (TOOL)
[주요작품]
<Empty>, <너는 이곳에 없었다.>, <정복>, <TOOL>, <BIg Press>
권재헌 |
김종덕 세종대학교 뉴미디어퍼포먼스융합전공 초빙교& choom102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