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군가는 이 영화를 통해서 '표현의 윤리' 문제를 언급하고 싶을 수도 있겠다. 사실 많은 영화들(우리가 명작이라고 칭송하는 작품들에서 조차)에서 고발이라는 명목으로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사실 묘사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그런 표현 방식에 대한 올바른 윤리적 대안으로 해석될 부분도 분명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의 그런 절제된 표현 방식이 과연 작품이 담아내고자 하는 주제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얼마나 더 효과적이었는가에 주목하고 싶었다.
모든 예술 작품들은 '보여지는 것'과 '감춰지는 것'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창작자들은(스릴러 장르라면 더더욱)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클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감추고 싶은 것 속에 핵심이 있다. 어디 창작 예술에서 뿐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살이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진실은 감추고 싶은 것 뒤에 있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감춰져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들에 주목하게 만든다.
인간은 오감을 이용해서 세상을 인식하고 상황을 파악한다. 보통의 경우 인간의 시각은 청각에 우선한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쉽게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게 다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와쇼스키 형제는 <매트릭스>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줄곧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세상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영화가 시작되고도 제법 오랫동안 관객들이 만나게 되는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화면 뿐이다. 그리고 흐릿하게 들려오는 소리들. 관객들은 어쩔 수 없이 그 흐릿한 소리에 귀 기울일 수 밖에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시작되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한다. 마치 시각장애인들이 청각에 의지하듯이. 그렇게 영화는 '보이는' 화면이 아니라 '들리는' 소리에 우리를 집중 시킨다. 하지만 그 소리의 정체를 우리는 쉽게 알아낼 수는 없다.
비로소 어두운 화면이 걷히면 아름답고 평화로운 전원 풍경이 드러나고, 우리의 주인공들은 그 평화로운 풍경의 마을에 사는 일가족임을 알게 된다.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아버지이자 자기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가장. 자녀들을 아끼는 어머니이자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집 안팎을 가꾸는 주부. 이들 가족의 모습은 분명히 '소박한' 행복을 꿈꾸며 '성실히' 살아가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다. 영화의 내용 역시 특별하지 않다. 그저 보통의 가정들에서 있을 수 있는 일상의 모습들. 사소한 것에 흥분하고 좌절하고 행복해 하는 일상의 모습이 전부다. 그러나 이렇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곧 눈치챌 수 있다. 이 평화로운 가정집의 담장 바로 너머에서는 인류사 중 가장 끔찍하고 야만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영화가 하나 둘 씩 던져주는 단서를 통해 관객들은 지금 담장 너머에서 혹은 화면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나간다. 그러면서 처음엔 모호하게 들리던 소리의 정체가 점 점 분명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때론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내가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 그럴 때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그동안 귀 기울이지 못했던 소리들에. 담장 너머에서 들리는, 혹은 내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알게 되는 세상이 있다.
영화는 그렇게 담장 너머의 상황을 보여주지 않고도 담장 너머의 진실을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담장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이미 교육과 많은 정보를 통해서 알고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영화 속 상황의 역사 배경이나 정보를 전혀 모른 채 봤다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이 영화 속 사건의 진실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이 영화는 평범한 중산층 군인 가족의 시시콜콜한 드라마 정도로 받아들여졌을지 모르겠다.
2.
담장 하나 너머에서는, 그리고 영화 밖의 더 넓은 세상에서는 끔찍한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너무나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영화속 가족들의 모습은 다소 기이하게 느껴진다. 피터 위어 감독의 <트루먼 쇼>에서 나왔던 그 가공의 세상 만큼이나 닮아 보이는 공간.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바깥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공간. 그렇게 영화 속 공간은 탈역사적 공간으로 해석된다. 아마도 이게 이 작품이 보여주고 싶었던 시공간이 아니었을까? 특정한 시간, 공간에서 벌어졌던 과거의 사건이 아닌, 시공간을 초월한 현재성의 공간과 사건 속으로 우리를 불러들인 건 아닐까? 그렇게 영화의 이야기는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우리에게 소환된다.
누군가는 이 영화가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했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영화라고 말한다. 나는 이 영화가 그 보다 한 발 더 들어가서 보다 사적인 영역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주부는 자신이 애써 가꾼 집 안팎의 소소한 행복들이 해체되거나 박탈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그녀에겐 그 것이 세상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담장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따윈 상관없었다. 내 가정의 '소박한' 행복만 지킬 수 있다면.
'일상의 행복'과 '가족의 가치'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우리는 이 두 가지의 가치에 토대를 두고 가꿔 온 자기만의 세상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트루먼 버뱅크는 타인들이 만든 가공의 세상에서 타의에 의해 살았지만, 우리는 스스로들이 만든 각자의 세상에서 각자의 방식과 취향에 갇혀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각자의 세상에 살고 있을 때, 그 '관심영역'(일본에서의 이 영화 개봉 제목은 <関心領域>이었다)으로 부터 배제된 세상은 우리의 삶에서 잊혀져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나의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이 유지된다면, 내 관심영역 밖의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일까? 그래서 회스 부부의 집 주위를 검은색으로 칠한 영화 포스터는 이 영화의 의미를 적절하게 잘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관심으로부터 배제된 세계.
영화는 대부분의 샷을 사람의 눈높이에 맞춘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우리는 담장 너머조차도 들여다 보지 못하고 눈 앞에 '보여지는' 장면만 보게 된다. 때로 우린 일상의 시선에서 벗어나 다른 높이와 다른 각도에서 세상과 사물을 봐야 한다. 그래야 나를 둘러싼 세상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은 많았다. 그 영화들은 우리들에게 끔찍한 과거를 상기 시켜주었지만, 우리는 극장을 나오는 순간 우리 앞에 펼쳐진 평온한 현실에 안도하며 영화 속 그 끔찍한 장면들은 기억의 지평선 저 너머로 묻어버렸다. 하지만 조나단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그 끔찍한 과거를 보여주는 방식 대신 너무도 평온한 현실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탈역사적으로 느껴지는 그 장면들은 현대를 사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환기시키면서 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지금 네가 보고 있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니? 네가 생각하는 가치가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하니? 네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알고는 있니?"
문제는 '악의 평범성'이 아니라 우리의 '무관심'이다. 내가 무언가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동안 내 관심으로 부터 벗어난 세상이 있다. 팔레스타인이나 우크라이나처럼 멀리 갈 것도 없다. 고개를 들고 관심있게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내 주위에서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3.
과거를 묘사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flash forward 장면이 하나 나온다. 아우슈비츠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관 내부로 보이는 전시관 장면. 수북히 쌓여있는 주인 없는 신발들이 무슨 의미인지 우리는 안다. 하지만 그것들 역시 유리벽 안에 박제되어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유리벽 속 공간이 아닌 우리의 현실 속에서 버려져있는 신발들이다. 아니 신발들 보다 더 형편 없이 던져진 사람들의 몸뚱아리다. 우리들의 '소박하고 성실한 삶'속에서 배제되어 잊혀져 가는 몸뚱아리들이 있다.
한 때 '나' 보다는 '우리'에 가치를 두고 '가족'이 아닌 '세상'을 바꾸겠다던 젊은이들이 이 땅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 중 많은 이들이 '우리' 보다는 '나'의 가치 실현에 중점을 두고, '세상'보다는 '가족'의 삶을 바꾸는 일에 충실하며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잊혀진 것들.
우리 나라보다 앞 서, 1960년대 일본에서도 전공투의 불꽃 같던 투쟁이 있었다. 그 뜨거웠던 혁명의 열기도 서서히 식어갔고, 그 당시 젊은이들은 그렇게 세상과 또 닮아갔다. 포크 음악은 그들의 친구요 동지였다. 하지만 그들이 세상 속으로 흡수되는 것과 함께, 포크 뮤지션들도 하나 둘 주류 음악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점 점 멀어지며 개인의 삶으로 침잠해가던 젊은이들을 보면서, 그 당시에 등장했던 포크 뮤지션 이노우에 요수이(井上陽水)는 1972년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곡 <傘がない(우산이 없어)>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앞 부분 생략)....
TV에서는 우리나라의 장래 문제를
누군가가 심각한 얼굴로 떠들고 있어
하지만 문제는 오늘 내리는 비 우산이 없어
가야지 널 만나러 가야지
네 집으로 가야지 비에 젖어
매서운 비가 내 눈 속으로 내려
너의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래도 괜찮은 걸까?
.....(뒷부분 생략).....
글_한요한(애니메이션 감독)
<THE ZONE OF INTEREST>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드라마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제76회 칸 영화제 그랑프리 및 칸 사운드트랙 수상작이자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국제영화상, 음향상 수상작이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첫 3대 영화제 경쟁부문 수상작이다.
-
영화의 제목이자 원작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는 독일어 단어 "das Interessengebiet"를 번역한 것이다. 이는 나치 독일이 아우슈비츠와 그 주변 지역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했다. 여기에서 독일어 Interesse(영어 Interest)의 의미는 "관심"이 아니라 "금전적 이득"에 가깝다. 나치가 아우슈비츠의 격리를 위해 주변 지역 농지를 폴란드 지주들로부터 몰수한 뒤에 그 빈 땅에 수용소의 포로들을 노역시켜서 농사를 짓고 자신들의 금전적 이득으로 돌아오도록 했기 때문이다. 물론 수용소의 비참한 일상을 바로 옆에서 보면서도 무시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지내는 비인륜적인 독일인들의 모습을 보면 중의적인 표현도 노린 듯 하다. _나무위키 참조
한요한 애니메이션 감독 themove99@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