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찬이 2022년 6월 열린 ‘반 클라이번 콩쿠르’ 예선전에서 격정적으로 연주하고 있다. 반 클라이번 재단 제공 |
1. 임윤찬의 ‘소리’
임윤찬이 임윤찬을 이겼다. 영국 ‘그라모폰 클래식 뮤직 어워즈’ 피아노 부문에서 쇼팽 에튀드 전곡 음반이 리스트의 초절기교연습곡 실황 음반을 한표 차로 이긴 것이다. 그의 수상뿐만 아니라 수상 소감도 인상적이고 감동적이다.
“저와 제 음악은 제 주변 사람들에게 매우 감사해야 합니다. 음악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은
제가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듣고 느낀 것들을 포함해 사소한 모든 것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태어났을 때 처음으로 접한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저희 부모님의 말투부터 시작해서 제 눈으로 본 모든 것, 그리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고 배운 것, 이 모든 것들이 제 음악에 녹아 있습니다. 이런 큰 상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제 가족, 선생님, 에이전시, 위대한 예술가들 그리고 제 친구들이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_(임윤찬, 그라마폰 수상 소감)
여기서 임윤찬은 “처음으로 접한 음악”을 ‘부모님의 말투에서부터’ 출발해서 자기 눈으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이라고 하였다. 보통은 네 살때 어디서 들은 모차르트 피아노 선율, 혹은 누구의 노래 이런 것들을 얘기했을 법한테 음악의 모태가 부모님의 ‘말투’라니! 놀랍게도 그의 음악 세계는 좁은 개념의 전통적인 음악을 넘어서 ‘소리’의 세계로 확장되어 있다.
나는 이 수상소감을 접했을 때 퍼뜩 1970년대에 머레이셰이퍼가 고안한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 즉 ‘소리풍경’ 개념이 떠올랐다. 사운드스케이프란 전통적인 음악개념 안에 있었던 악음(樂音)뿐만 아니라 비악음(非樂音)까지 포함하여 근대 미학의 전통적인 작품 개념에서 벗어나 일상적 삶의 소리 환경까지 포괄하려는 일련의 담론과 그 실천을 의미한다. 임윤찬이 머레이셰이퍼의 ‘사운드스케이프’ 개념을 의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소리’ 및 ‘소리 풍경’, 혹은 ‘소리 환경’으로 음악의 개념을 확장시켜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피아니스트의 인식이 음악학적 시선에서 의미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아니스트의 존재 이유는 대체로 콘서트 홀 무대 위에서 그 빛을 발한다. 그러므로 일상적 삶과 철저히 분리된 채 서양 근대음악 및 예술의 제도와 개념이 총화되어 나타나는 클래식 콘서트장 안의 소리를 일상의 소리환경과 연결하여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는 것은 전문연주가로서 쉽지 않은 일이다. 생활세계의 소리와 콘서트 음악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넘어서 전체로서의 소리풍경을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임윤찬의 통찰력은 왜 그의 음악이 기예를 넘어선 높은 수준의 예술세계를 보여주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또한 음악전문가들이 콘서트 홀의 음악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소리환경 전반에 대해서도 실천적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새삼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2. 한강의 ‘소리’
한편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다.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이 주는 여러 가지 의미에 대해 무수한 논의들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유럽 백인남성중심의 대척점에 있는 아시아 젊은 여성 작가의 수상은 통쾌하고 기쁘기 그지 없다. 또한 이번 수상의 의미가 에코 페미니즘부터 제3세계 저항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되고 있는데 유독 나의 주목을 끈 것은 작가의 ‘소리’에 대한 언급이었다. 언어를 다루는 작가가 그 속성이 판이하게 다른, 청각 매체인 소리를 신비롭고 관심있게 바라본다는 것은 뜻밖이기 때문이다.
“소리라는 거는 만져지지도 않구요.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한테 청각기관이 없었다면 몰랐을... 그렇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그런 것인데, 참 신비롭게 생각이 돼요. 특히 음악을 들으면, 정말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맡을 수 없는,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래서 소리를 생각하면 항상 신비로운 생각이 들고, 아까 얘기한 것처럼 사람의 목소리에도 그 사람의 내면이 깃들잖아요. 그래서 소리에도 관심이 있습니다”(한강, 2005. KBS, 1TV)
그는 ‘만져지지도 않고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신비로운 것’으로 소리를 정의한다. 특히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그에게는 어떤 이미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음악이 주는 특별한 정서가 그 이미지를 포착하는데 중요한 영감을 준다고 한다.
나는 노래나 가곡뿐만 아니라 기악곡을 쓸 때 음악의 영감을 시나 소설을 비롯한 문학에서 찾는 작곡가들은 심심찮게 봐았다. 그런데 소설가가 비언어적 소리 매체를 통해 어떤 이미지를 포착하다니, 문학이 음악에 빚을 지기도 하는구나. 예술의 본질로 들어가면 결국 다 하나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또한, 한강은 소리 중에서도 특별히 목소리에 주목한다. 사람의 목소리에는 그 사람의 내면이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목소리는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몸의 확장이다. 음악심리치료에서 목소리는 그 사람의 페르소나(persona)속에 감춰진 참 자아를 표현하는 몸의 일부다. 그런데 보컬 심리치료에서는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목소리 대신에 억압된 인간의 내밀한 목소리, 즉 원초적인 자연 그대로의 ‘어글리 보이스(ugly voice)’가 중요하다. 한강의 소설을 독자들이 읽을 때 고통스러워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모두 감추고 싶고 듣고 싶지 않은, 역사적인 ‘어글리 보이스’, 즉 집단적 트라우마를 여과없이 대면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작별하고 싶은데 그는 작별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이렇듯 한강의 소리에 대한 자각은 단지 ‘소리’ 자체에 대한 물리적 현상에 머물지 않는다. 소설에서 들려지는 학살당한 자들의 목소리는 국가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자들에게는 외면하고 싶은 ‘어글리 보이스’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상실된 목소리, 무참히 짓밟힌 채 호명되지 못하는 망자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고 은밀하게 독자들의 귀에, 양심에 직접 내리꽂는다.
또한 잃어버린 자들의 목소리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제의적, 신화적 기능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비폭력의 상징인 식물로의 회귀를 갈구하는 <채식주의자>에서 주인공 영혜의 나무되기는 생명의 근원설화에 다가서는 신화적 의미로 읽혀지고 <소년이 온다>에서 작가는 죽은 자에 빙의한 강신무처럼 망자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재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 혹은 예술가의 진정한 역할은 사제이자 치료자에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시적 산문’에 함축된 의미 중 또 하나 주목하는 측면은 원래 시 자체가 가진 노래성이 소설 속에 녹아들어 있다는 점이다. 한강의 소설은 작가 자신의 음성으로 읽혀질 때 어떤 현대 시보다도 더 은율성을 띄며 시를 낭송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내재적 은율을 심상 속에 구현하며 한 문장, 한 문장을 읊은 것들이 소설로 받아쓰기 된 것 같은 문체이다. 근대적 문자문화가 지배적인 시대로 오면서 시조차 노래와 분리되고 ‘산문적 시’가 대세인 시대에 오히려 소설에서 내적 은율과 시적 정취를 회복하여 ‘시적 산문’을 만든 것이다.
언어를 다루는 작가는 본래 문학과 한 뿌리였던 소리의 중요성을, 악음을 다루는 피아니스트는 주변의 일상적 소리가 자신의 음악을 배태한 뿌리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이러한 통찰은 모든 것이 연결되었다는 전체성을 깨닫게 해준다. 나아가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한 차원 높은 각성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예술성이 아닐까.
이소영 음악평론가. 음악연구소NUNC 소장 themove99@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