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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수의 무빙액트] 낡은 서랍 속 바다

기사승인 2021.05.12  07: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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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할아버지>와 <어느 김씨 집안 박씨>

이따금 어질러진 방을 크게 뒤집을 때가 있다. 벽을 향해 붙어 있던 책상을 창가로 옮기고, 책장의 책들도 몽땅 끄집어내서 새로 분류하여 꽂는다. 쓸모없어진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커다란 종량제 봉투에 하나둘 던져넣고 책상 주변도 깔끔하게 치운다. 일전에도 제법 많이 버린 것 같은데, 때마다 나오는 게 뭐가 이리도 많은지, 점심때 시작한 정리는 해 질 무렵이 되어도 쉽게 끝나지 않는다.

책상 서랍도 열어본다. 낡은 카세트테이프, 외국 풍광의 엽서, 들러붙은 사진들, 녹슨 열쇠고리, 편지 봉투와 잉크가 번지 낯익은 주소... 잠시 멈추었다가, 자주 듣는 플레이리스트를 틀어 놓고 좁은 방안의 동서남북을 걷고 또 걷는다. 버리고 꽂고 얹고 넣고,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방 한복판에 쌓인 책더미 위에 앉아 쉬며 세월을 되감는다. 그러다가 이삼십 년이 지난 다이어리나 앨범을 손에 들기라도 하는 때면 청소는 이미 뒷전이 되어 있다. 기록과 흔적. 그것들과 마주칠 때 우리는 거기에 비쳐보이는 지금의 나를 만난다. 반갑다가 부끄러워하고 괜스리 미안해도 하다가 그렁한 미소로 다시 일어설 힘을 얻기도 한다.

 

나와 가족에 관한 두 편의 연극을 만났다. 그중 하나는 2013년 초연 이래 꾸준히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나와 할아버지(민준호 작,연출)>, 다른 하나는 세종문화회관 S-Theatre에서 만난 ‘3 New Theatre’의 <어느 김씨 집안 박씨(김지욱 작,연출)>이다.

“낡은 장롱 속 나프탈렌 냄새”로 시작하는 <나와 할아버지>는 작가 겸 연출가 민준호의 자전적 에세이를 무대화한 작품으로 미니멀한 무대에 재기발랄한 대사도 일품이지만, 이 작품이 지닌 진짜 매력은 작가 자신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솔직함에 있다.

작가는 준희라는 주인공을 앞에 내세워 자신의 경험을 대신 살게 하면서, 동시에 작가역으로도 출연하여 상황을 설명해준다. 멋진 멜로드라마를 쓰고 싶어 하던 준희는 선생님의 권유로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취재한다. 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잃고, 역사의 골짜기를 치열하게 걸어 온 고집스러운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평생을 인내로 살아 내었을 할머니. 할머니의 잔소리는 쉴 새 없고, 두 분은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한다. ‘사람 찾기’를 극구 반대하던 할머니가 병으로 입원한 틈에 할아버지는 준희를 대동하여 춘천으로 ‘임수임’할머니를 찾아 나선다. 전쟁통에 헤어진 은인을 찾아온 춘천에서 겨우 만난 한 할머니는 치매로 인해 당사자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왜 이제 왔냐’며 울음 우는 치매 걸린 어느 할머니와 잘못 찾은 것 같으니 그만 돌아가자는 손자의 얘기에도 차마 돌아서지 못하는 할아버지. 그곳으로 할머니의 부고가 날아든다. 전쟁통에 죽으로 끓여 먹던 아욱국을 드시던 백반집 골목 끝에 뒤돌아서서 할아버지는 담배만 뻑뻑 피워올렸다. 할아버지의 뒷모습. 할아버지는 그렇게 등으로 말했다. 할아버지의 속울음이 연기로 오르고 그 뒤에서 준희가 그 뒤에 작가가 그리고 차마 다가서지 못하는 우리가 지켜보고 있었다.

3New Theatre의 <어느 김씨 집안 박씨>는 제목 그대로 김씨 집안에 시집가서 한평생을 살아 낸 어느 박씨 어머니의 이야기다. ‘설합 속 묵은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연극은 어머니의 49제를 지낸 후, 어머니를 떠나보낸 소감을 <법우지>에 실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연극은 기억의 연극입니다.”로 시작되는 연극은 어머니께 들었던 이야기를 따라 어머니의 인생길을 더듬어간다. 김지욱 작가의 어머니는 1920년대, 일제강점기이자 무조건적인 순종만을 강요받던 시대에 태어났다. 해방과 6.25동란, 그 이념의 틈바구니에서 억척같이 살아 낸 공포와 가난의 세월. 그리고 그 어떤 사상보다 뿌리 깊게 박혀있던 그놈의 남아선호사상.

어머니는 열 명의 아이를 낳아 그중의 셋을 난리통에 잃었고, 딸만 내리 낳다가 느지막이 아들 하나를 낳았다. 오십이 넘어서는 아직 젊은 남편을 잃었고,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자식들 때문에 집을 날리는 등 옛 속담처럼 ‘바람 잘 날’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렇게 신여성을 꿈꾸던 한 소녀가 남편을 지키고 자식을 살리다가 아흔의 노인이 되어 먼 길을 떠났다. 무심한 아들의 속죄는 ‘그리움과 후회’의 글 대신 무대에서 ‘노래와 춤’으로 어머니를 되살리고 있다.

사실 그다지 영웅적이지도 드라마틱하지도 않은 어디서 한 번쯤은 들었음 직한 이야기들이다. 그런데도 아들이 깔아 놓은 무대 위의 꽃길은 여지없이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든다. 하나밖에 없는 내 어머니, 내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라서일까.

 

뻔히 안다 생각했던 가족의 삶이다. 한데 가만 돌아보니 내방 구석의 낡은 앨범이, 나보다 푸르렀던 그들의 꿈이, 내 할아버지의 등이, 내 어머니의 손이, 멀리 두고 가족이란 핑계로 묻지 않았던 그분들의 목소리가 인제 보니 모두가 명작이다.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는 패닉이 1998년에 발표한 3집 《Sea Within》의 타이틀곡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_3Gwsd5idrc

 

진남수 (호원대 교수, 극작가, 배우)

 

 

 

 

진남수 호원대 교수 / 극작가, 배우 namsulse@hanmail.net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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