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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근의 리허설룸 4] <파르지팔> 두번째 이야기- 여주인공 쿤드리

기사승인 2022.04.25  10: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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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의 산물은 지속해서 검증되고 새로 해석돼야 하는 것이 문화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나는 바그너의 대표적인 여주인공들인 젠타, 엘자, 엘리자베트, 브륀힐데, 이졸데, 쿤드리역을 맡은 소프라노들과 역을 준비하면서 보낸 시간이 비교적 많다.

거대한 역만큼 방대한 텍스트와 음악, 그리고 살인적인 음역대를 소화해 내야하는 기본적인 훈련을 도와주는 작업 외에도 무대위의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극복해야 하는 바그너 여가수들의 정신적 부담감을 희석할 수 있는 대화의 상대도 되어줘야 할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극장에서 배정한 개인 연습시간을 통해 이러한 역들을 소화할 수 있는 소프라노들의 탁월한 음악성과 지성, 더욱이 초인적인 체력관리를 위한 그들의 삶은 오페라의 내용만큼이나 복잡하고 많은 생각을 나눌 기회였다.

특히 쿤드리(오페라 <파르지팔 Parsifal>의 여주인공) 역을 맡은 드라마틱 소프라노 또는 메조 소프라노들과의 만남은 삶 자체를 예술의 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정신적 면역체계가 갖춰진 예술가들이었다. 십자가위에서 피흘리며 죽어가는 예수를 조롱하며 깔깔대며 웃는 헤로디아스를 물끄러미 쳐다본 구세주의 눈빛에 스스로 영원한 저주에 걸려 성을 매개체로 악으로 유인하는 쿤드리로 환생을 거듭해야 한다는 오페라 문헌상 가장 추악한 악녀의 모습이다.

 

성악가 개인 연습이 시작되면 전역을 한번 훑고 난 다음에 세부적으로 반복이 필요한 부분을 점검하면서 자연스럽게 깊이 있는 대화가 이뤄졌다. 독일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는 먼저 성악가에게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 문장의 의미와 왜 바그너가 이런 생소한 단어를 사용했는지 독일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는 지로부터 시작되었다. 동양인 레페티토어와 바그너를 공부해야 한다는 뭔가 불편하게도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대부분 그들은 나의 직책을 인정해주고 친절하게 나름대로 독일어 의미를 설명하면서 오히려 즐거워했다. 나 또한 그들의 높은 지성과 예절에 감탄했고 자신만의 쿤드리를 표현하기 위한 많은 고민과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 어느 책에서도 읽을 수 없는 살아있는 증언이었다. 그리고 나와 준비한 성악가들은 연출가와 컨셒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나와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언급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특정 연출가는 나에게도 의견을 묻기도 하며 파르지팔 모티브의 구체적인 음악적 사례를 요청하기도 하며 예술적 신뢰가 쌓여 갔다.

 

 

동료 레페티토어 중에는 천재적인 음악성과 지성을 가진 부류가 적지 않았다.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쇤베르크의 오페라 모세와 아론의 최종 피아노 리허설에 보컬스코어가 아닌 오케스트라 총보를 놓고 연주를 하거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협연하는 등 그들의 재능은 극장 전체에 전설처럼 퍼져있고 실지로 커다란 음악적 권위를 가지고 있기에 성악들은 전속 레페티토어와의 개인 연습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파르지팔> 중 쿤드리역은 악녀가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음악적으로도 표현된다. 바그너가 베니스에서 파르지팔 작곡을 구상하던 중 시장에서 생닭의 목을 쳐서 요리하는 순간에 영감을 받아서 모티브에 사용했다고 한다. 쿤드리는 악몽에 시달리는 신음에서부터 닭 모가지가 날아가는 비명과 더 나아가 날카로운 복수의 웃음을 찢어지듯 웃어야 한다. 마지막에는 속죄의 눈물에 흐느낌을 표현해야 한다. 이 모든 중요한 지점들이 음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음악 외적인 재료로 전달되는 것은 성악가들에게 엄청난 상상력과 용기를 요구한다.

 

또한, 쿤드리의 외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그들의 노력 또한 안타깝게 하기도 한다. 오페라 가수에 대한 무대 위의 적합한 미적 이미지에 대한 요구는 국제화 시대와 함께 매우 높아졌다. 크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위해 도움이 되는 신체조건에 대한 배려보다는 작품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캐스팅을 해야만 하는 극장장들과 연출자들의 고민은 날로 심각해져 간다.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눌 수 있는 한 연출가가 푸치니의 나비부인 연출 의뢰가 와서 출연진을 물어봤더니 쵸쵸상이 아프로 아메리칸이라고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고 한 적이 있다. 나는 아이다를 금발 소프라노가 부르는 건 어떻게 생각하냐고 되물었더니 궁색하게 베르디의 예술세계가 이러쿵저러쿵 떴다방 논리를 펼쳐대서 감자나 먹으라고 한 적이 있다.

쿤드리역은 또한 많은 인종적 토론을 감수해야 한다. 바그너만큼 정치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는 작곡가도 없다. 그의 반유대적 정치성향이 그의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숨길 수 없다. 그러나 20세기에 저질러진 인류 최악의 비극 역사에 드리워진 그의 작품세계에 관한 연구는 계속돼야 한다. 그의 작품을 단순히 위대한 음악으로 칭송되어 무대 위에 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지울 수 없는 역사 속에 태어난 예술의 산물은 지속해서 검증되고 새로 해석돼야 하는 것이 문화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Richard Wagner: Parsifal - Staatsoper Berlin

https://youtu.be/gh4eTW9DNcg

글: 윤호근, 지휘자

사진: 김진수, 칼스루에 국립극장

윤호근 지휘자 themove99@daum.net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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