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윤찬의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024.6.22. ⓓBonsook Koo_MOC (1) |
지난 호에 이어 임윤찬에 대한 비평을 연재한다. 지난 달이 '쇼팽 에튀드' 앨범에 관한 것이라면, 이번 달에는 라이브 연주로 들은 임윤찬 피아니즘의 실체적 접근에 대한 비평이다.
이번 광주예술의전당의 기획으로 <임윤찬 피아노 리사이틀(Yunchan Lim Piano Recital)> 초청공연의 프로그램은 1부 멘델스존 <무언가> 2곡(Op.19-1 E장조, Op.85-4 D장조)과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12곡, 2부 무소르그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y)의 <전람회의 그림>으로 구성됐다.
필자는 6월 19일 광주예술의전당(대극장)에서 열린 임윤찬 리사이틀을 관람했다.
1부는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정수인 시적 에센스를 피아노로 오롯이 구현하였다면, 2부 <전람회의 그림>은 이 곡에 대한 최근 몇십년 동안의 연주에 있어 가장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해석을 담아 임윤찬의 천재성에 대한 핵심에 다가갈 수 있었던 곡이었다. 이렇듯,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연주가 너무나 파격적이고 이후 음악애호가나 피아노계와 평론계에서 지속적인 논쟁과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어서 이번 리뷰는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에 집중하려고 한다.
광주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024.6.19_ⓒ광주예술의전당 |
이번 <전람회의 그림>을 들으면서 시종 나를 이끌고 갔던 것은 어디선가 인터뷰를 했을 것 같은, 상상되는 임윤찬의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들었던 <전람회 그림>의 모든 연주는 다 잊어주세요. 음표를 제외한 모든 악상 표시와 부호도 다 잊어주세요, 악보조차 단지 하나의 레퍼런스일 뿐이어요. 그 어떤 것도 나의 상상력과 자유를 가둘 수는 없어요. 이제 나만의 새로운 노래를 부르겠어요”
임윤찬의 손목 부상 이후, 쇼팽 <에튀드> 전곡의 대체 프로그램이 무엇일지가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그런데 최근 임윤찬이 JTBC의 ‘고전적 하루’에서 자신에게 두 개의 자아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꼭 ‘해야만 하는’ 것을 하는 자아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자아가 공존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해야만’ 하는 곡에는 쇼팽 <에튀드>를, ‘하고 싶은’ 곡에는 <전람회의 그림>을 언급한 것이 주의를 끌었다.
그럼 왜 하필 <전람회의 그림>이 하고 싶은 걸까?
<전람회의 그림>은 오케스트라로 쓰여진 곡들보다 더 오케스트라적인 피아노 곡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오케스트라 편곡이 사랑받는 이 곡은 분명 임윤찬의 자유를 향한 갈망과 악보를 그가 계시받은 새로운 영감을 담아내기에 더없이 매력적인 그릇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호로비츠에게는 오케스트라적인 부분이 오히려 양날의 칼처럼 감점 요소가 됐다. 호로비츠는 피아노로 치기에는 조금 빈 듯 한 부분의 공간들을 꽉 채워 좀 더 피아니스틱하게 편곡한 버전이 필요했다. 임윤찬이 호로비츠 판으로 연주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의 결과 소속사 목 프러덕션으로부터 호로비츠 버전이 아닌 원곡으로 연주한다는 공식적인 답변을 받았다.
그런데, 호로비츠 버전이 아닌 오리지널 버전 연주는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호로비츠 편곡이라는 한계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기존에 다수 연주된 거장들의 해석과, 또 작곡가의 의도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원곡의 악보와 비교할 기회를 얻어 임윤찬의 음악 해석이 얼마나 파격적이고 도발적인지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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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엇이 그렇게 도발적이고 파격적이어서, 나를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는 듯한 충격과 전율로 나를 몰아넣었단 말인가?
첫째, 악상 처리의 파격이다. 악보에 적힌, 그리고 이를 대체로 따르는 연주자들의 악상 처리와는 사뭇 다르게, 어떨 때는 정반대로 침으로써 다이나믹의 전복을 가져오는게 부지기수였다. 먼저 첫 곡 '프롬나드'에서 세 번째 마디에서부터 예기치 않은 피아노(p)처리와 긴 페달링으로 반전을 꾀했다. 그 이후로 번번히 악보 및 다른 기존 연주와 다른 악상 처리를 보여주어 처음에는 이를 따라가기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피아니시모로 연주할 부분을 포르테로(2.고성, 3.튈러리) 처리하고 포르테와 스타카토로 연주할 부분을 작게 치면서 페달을 사용한다던가(3. 튈러리) 등은 뒤에 벌어진 여러 반전의 연속에서 극히 일부에 해당한다. 도발적인 무수한 악상 처리로 인한 예외성으로 인하여 스릴감과 짜릿함을 이처럼 느끼게 하는 연주는 필자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번이 최초였다.
둘째, 악보에 새로운 자신만의 음표를 삽입하거나 구성에 변화를 주었다. 호로비츠 편곡과 상관없이 원곡 버전 위에 임윤찬 본인이 삽입하거나 추가한 트릴과 아르페지오, 앞꾸밈음과 한마디 정도의 멜로디 첨가, 총 5개의 프롬나드 중 마지막 프롬나드의 생략 등 작은 부분에서 큰 구성에 이르기까지 임윤찬 버전의 악보가 따로 존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단언컨대, 이번 연주를 계기로 <전람회의 그림>은 원곡 버전, 호로비츠 버전, 임윤찬 버전으로 이제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현장의 소리로만 감별될 수 있는 차원의 얘기인데, 음색 및 템포에 관한 그의 수백, 수만가지의 어휘를 구사하기 위해 동원된 그의 독특하고 설득력 있는 아티큘레이션(레가토, 논레가토, 마르카토, 스타카토, 포르타토)과 템포 루바토 및 아고긱의 변화무쌍함 등은 해석의 경지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연주자의 해석에 대한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으며 그 경계는 창작과 해석의 어디쯤에 위치하는지 등 연주에 관한 음악철학적으로 근본적인 질문들을 불러일으켰다.
넷째, 『판단력 비판』의 쾌와 불쾌, 미와 숭고 등 근대미학의 초석을 다졌던 칸트의 미학, 즉 ‘아름다움(美)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5곡(먹이를 문 병아리의 발레)에서부터 마지막 곡 “키예프의 대문”에 이르기까지 긴 호흡으로 질주하면서 점층적으로 쌓아 올려진 정서적 효과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경지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칸트가 말했던, 대자연의 파괴적 위력 앞에서 느끼는 ‘숭고’와 상통하는 쾌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저음역대에서 배음들이 뒤섞여진, 굉음에 가까운 금속성 소리와 때려부술듯한 타건을 통해 나오는 압도적 음향과 저음역, 고음역, 중음역에서 각각 질적으로 다른 성격의 사운드 및 여러 다른 악기 소리를 상상케 하는 음색의 다변화와 함께, 극단적으로 몰아치는 질주 및 숨이 멎을 듯한 멈춤(pause) 등의 과감한 템포 운용은 시종일관 우리의 감성을 압도하였다. 이는 마치 자연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느끼는 역동적 숭고미와 함께 쾌와 불쾌가 혼융된 새로운 미적 쾌감마저 불러일으키고 칸트가 구분했던 이성과 오성, 감성을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에 섞어 버리는 듯한 효과를 가져왔다.
결론적으로 쇼팽 에튀드 녹음에서 보여준 상대적으로 절제되고 정제된 표현과 해석을 뒤로하고, 마치 적토마가 답답한 울타리를 벗어나 지평선만 보이는 광활한 광야를 거침없이 질주하는 듯한, 드넓은 청공의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독수리 같은, 그의 비상을 받아주고 품어줄 작품으로서 <전람회의 그림>은 쇼팽의 <에튀드>를 듣지 못해 애석해하는 그의 팬들에게 그 이상을 선물한 ‘신의 한수’였다. 또한 이제 갓 20세가 된 청년 거장이 호로비츠와 리히터, 키신 등을 제끼고 직접 무소르그스키와 맞대결하면서 작곡가의 의도를 작곡가 자신보다 더 잘 보여주려하는 도전성과 담대함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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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찬이 <전람회의 그림>을 통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피아노라는 악기의 본질과 잠재성을 호로비츠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원곡의 음표를 많이 손을 대지 않고도 더 독창적이고 더 입체적으로 해석하여 피아노의 한계를 무한대로 넓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피아노는 더이상 ‘작은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기존 오케스트라가 할 수 없는, ‘다른 오케스트라’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나의 감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날의 무대는 마치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 4악장 시작의 바리톤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였다. 과거의 노래는 다 잊고 이제 새로운 노래, 새로운 서사를 쓰자는 선포를 통해 피아니스트 계보 역사에서 신인류의 탄생을 확인하는 역사적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영웅의 탄생에는 많은 소란과 논란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마련이다. 아마도 임윤찬의 <전람회의 그림>이 전 세계 클래식 팬들에게 영상으로 공개된다면, 그의 해석에 대한 진보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 혹은 엄격음악 신봉자들 사이에 적잖은 논쟁이 있을 수도 있으리라.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이소영 음악평론가 themove99@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