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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표 너머를 상상하는 임윤찬의 말과 음악

기사승인 2024.06.03  19:5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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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윤찬의 말과 음악, 그리고 상상력

올해 4월 19일에 임윤찬의 음반이 출시됐다. 발매 이전부터 클래식매니어들에게 화제를 모은 그의 쇼팽 에튀드 전곡 음반은 클래식 명문 레이블인 데카(DECCA)와 레코딩 전속 계약을 맺고 낸 첫 데뷔 앨범이자 첫 스튜디오 앨범이다.

쇼팽 에튀드 전곡이 피아니스트들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흔히 피아노 음악의 구약 성서로 바흐 '푸가'를, 신약 성서로 '베토벤 소나타'를 꼽고 있으나 실제 근대 피아니즘에 대한 최고의 경전은 '쇼팽 에튀드'를 꼽을 수 있다. 

쇼팽의 연주를 직접 본 음악평론가 페티스가 한 “베토벤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썼지만 쇼팽은 피아니스트를 위한 음악을 썼다”는 재치 있는 비교는 쇼팽 음악이 피아노음악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쇼팽 에튀드는 피아니스트라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산인 것이다. 내가 피아노에 입문했던 50여년 전만 해도 피아노 전공을 결심한 초등학생들 경우 고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쇼팽의 에튀드(대부분 25-2)에 첫 발을 내딛었다. 쇼팽 에튀드는 자신이 전공을 할 만한 재능이 있는지를 가늠하는 첫 관문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쇼팽 에튀드를 초등학교 저학년때부터 치는 트렌드가 대세가 된 걸 보면 마치 올림픽에서 신기록을 갱신하듯, 피아노의 기술적 측면도 급속히 진화한다고 볼 수 있다.

임윤찬_9737_ⓒLisa-Marie Mazzucco

임윤찬 역시 “피아노를 시작했을 때부터 쇼팽의 에튀드를 꾸준히 연습했다” 고 하면서 “에튀드를 연습하지 않을 때 조차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그 곡들이 원숙해졌다”고 하였으니 쇼팽 에튀드는 전통음악가들에게 산조처럼 어렸을 때부터 기량과 음악성을 동시에 연마하며 평생을 함께 할 음악적 동반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스튜디오 앨범의 첫 레퍼토리로 쇼팽 에튀드 전곡을 택한 것에 “피아니스트라면 피해갈 수 없는 작품을 선택해 이를 마주하는 결심”이자, “이 나이에 이 산을 넘어가려는 결단”이라고 표현하면서 “10년 동안 속에 있던 용암을 이제야 밖으로 토해낸 느낌”이라고 하였다. 피아노를 한때 전공했던 나에게 진검승부를 결단하는 임윤찬의 이 말의 무게감은 참으로 묵직하게 다가온다.

임윤찬_9727__ⓒLisa-Marie Mazzucco

클래식계가 임윤찬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백가지도 넘는다. 그런데 특별히 음악학적 시각속에서 그의 연주가 주목되는 배경에는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정수를 일찌감치 파악한 천재소년의 세계관 혹은 음악관이 작용한다. 지난 2년간 임윤찬의 연주 만큼이나 ‘임윤찬 어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본질적인 예술의 의미를 환기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음표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는 그의 연주처럼 한 단어와 그 다음 단어를 곱씹으며 느릿하게 발화되는 내용에는 현대 피아노 생태계에서 간과하고 잃어버린 낭만주의 세계관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힘이 들어있다. 이번 앨범 발매와 관련된 여러 인터뷰에서도 낭만주의 피아니즘을 통찰하게 하는 많은 명언들이 쏟아졌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주목하는 발언은 “근본있는 음악가”에 대한 것이다. 임윤찬은 첫 스튜디오 앨범으로 쇼팽 에튀드 전곡을 선택한 배경 설명에서 ‘근본있는 음악가’를 언급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근본있는 음악가의 두가지 요건 중 첫째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깊게 깔려있고 이를 두려움없이 표현하는 사람이며 예측 불가능한 타이밍에서 가볍게 던지는 유머가 있는 사람이다. 굳이 연주자에 제한하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상에 적용해도 매우 이상적인 덕목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생각하는 근본있는 음악가란 사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아닐까?

 다만 이런 성숙하고 매력적인 인간상이 스무살의 소년같은 청년의 입에서 그려진다는게 놀라울 뿐이다. 

둘째, 근본있는 음악가란 연주자가 음을 치자 마자 귀가 들을 시간이 없이 그냥 심장을 강타해 버리는 음악가이다. 그의 연주, 예를 들어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의 3악장 후반부에서, 쇼팽 녹턴 2번의 어느 지점에서,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중반부에서 느닷없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임윤찬 스스로 듣는 이의 ‘심장’을, 감동을 목표로 하여 부단히 노력한 결과였던 셈이다.

 

이번 쇼팽 앨범은 임윤찬 자신이 스스로 근본있는 음악가임을 입증한다. 피아노 세계에 철저히 몰입하는 진실된 태도와 자기 신뢰를 바탕으로 거침없고 두려움 없는, 과감한 표현 속에서 예측 불가능하게 툭 던지는 유머로 반전을 꾀하며, 이성에 기반한 ‘분석적 들음’ 이전에 소리가 ‘심장을 강타하는(뇌과학적으로는 편도체를 강타하는)’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정수를 스스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임윤찬이 쇼팽 에튀드를 해석하는 음악적 전략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의 모든 연주에 관통하는 대전제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음표 너머에 있는 숨겨진 내용을 찾아야 한다(호로비츠)”는 피아니스트의 절대 과제에 대한 것이다. 

이는 제레미 덴트가 [이 레슨이 끝나지 않기를]에서 언급했던 연주가의 두가지 과제와도 맞닿아 있다. 첫 번째 과제는 악보에 적힌 것을 행하는 것이고 두 번째 과제는 악보에 적히지 않은 모든 것을 찾는 것이다. 나아가 스승 손민수의 “기술적 어려움에 매몰되지 말고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너만의 서사를 담아내라”는 가르침도 체화되어 있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임윤찬은 대학 입시나 콩쿨의 단골 레퍼토리인 쇼팽 에튀드가 근본적으로는 “콩쿠르에서 연주할 만한 곡이 아니고 세상의 고통, 노인의 회환, 러브레터, 그리움, 자유 등을 표현”하는 매우 시적인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를 구현해야 하는 음악임을 간파한다. 또한 특이하게도 쇼팽의 에튀드에 드리워진 작곡가의 고독에 주목한다. 쇼팽 에튀드를 치면서 작곡가의 고독을 읽는 쳥년 연주가가 있다니 경이롭다. 또 고독에 대한 이해도 남다르다. 그에 의하면 쇼팽의 고독은 강제된. 슬픈 외로움이 아니라 예술을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고독이다. 또한 에튀드는 이러한 자발적 고독 속에서 쇼팽이 공들여 깎아 만든 ‘순수결정체’이다. 나아가 ‘고립이 최고의 성과를 달성하는 비결’이라고 하면서 예술적 성취를 위해 자발적인 고립과 고독을 선택하고 있는 임윤찬 자신을 쇼팽에게 투사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쇼팽 에튀드에 대한 임윤찬의 통찰은 순수예술(Fine Art)을 꿈꾸는 고독한 천재 개념과 문학과 시, 그림 등을 음악과 연결시켜 예술적 시심(詩心)을 고양시키는 낭만주의 정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라 할 수 있다.

 

쇼팽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과거를 돌아보는 느낌이 있어요.

리스트가 앞을 내다보는 음악가라면, 쇼팽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작곡가 인 것 같은데~ 쇼팽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정말 스테디한 왼손의 반주에 정말 쇼팽이 이래야만 하는 멜로디를 써내려간 것 같아요. 오른손이 화려한 멜로디가 아니라 정말 거르고 거른 순수 결정체 멜로디들을 써내려 갔고, 뒤에서는 고른 왼손의 반주로 뒤를 받쳐주는 그런 음악이라 생각해요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임윤찬의 쇼팽 에튀드에 대한 이해가 쇼팽 문헌만을 파고 들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00여년 전에 태어난 피아니스트들의 연주에 천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과거의 피아니스트들을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 앞에 현전시키고 있다. 

그가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 특별히 영향받은 피아니스트들은 이그나츠 프리드만(1882-1948),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3-1989), 알프레도 코르토(1877-1962), 유리 에코로프(1954-1988) 등이다. 

반 클라이번 콩쿨 우승 이후 임윤찬의 인터뷰에서도 그가 언급한 피아니스트들이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호로비츠 외에도 마리아 유디나(1899-1970),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1901-1961) 등이 그들이다. 

임윤찬은 ‘어려운 시기를 살면서 얻은 경험과 고통이 그들의 연주에 독특하고 강렬한 목소리를 부여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였다. 

이처럼 임윤찬은 그가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들을 통하여 자신이 상정한 음악적 유토피아를 명확히 드러낸다. 그가 그리는 유토피아는 현재의 자본주의적 스타시스템이나 콩쿨, 입시 등의 일정한 기준과 안전한 해석을 요구하는 20세기 후반 이후의 제도권 음악과는 스스로 거리를 두며 순수예술(fine art)의 정수를 견지하려는 19세기 낭만주의적 예술관과 상통하는 세계이다. 

임윤찬이 13살 때 프리드만의 연주를 듣고 길에서 걸음을 멈출 정도로 충격을 받은 이유는 그에게서 현재 피아니스트들에게 발견하기 어려운 ‘창의력’과 ‘자유로움’을 제대로 처음 느꼈기 때문이고, 알프레드 코르토의 연주에 경도된 이유도 현대 피아니스트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벨칸토 스타일의 특이한 박자와 음색으로 쇼팽의 에튀드를 연주하면서 ‘피아노 연주는 상상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에코로프 연주 역시 ‘순수한’ 수정같이 ‘시적 상상력’과 곡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보여주기 때문에 인상적이었다. 이렇듯 현대피아니스트들이 아닌 한세기 전 피아노 거장들에게 심취한 이유는 이들이 독창성을 중요시 하는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정수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임윤찬의 피아니즘은 19세기나 20세기 초반에 중요했던 풍부한 상상력과 세속화되지 않은 순수성, 자유롭고 개성적인 해석으로 압축된다.

 

Jessica Duchen, 음악저널리스트

이러한 연주 배경과 세계관을 숙지한 가운데 앨범 자켓에 수록된 ‘임윤찬, 제시카 듀첸(Jessica Duchen)과의 대화’에 나타나는 임윤찬의 해석 과정은 크게 3단계로 대별된다. 

첫 번째 단계는 작품번호 10번의 12곡과 25번의 12곡 전체를 하나의 작품처럼 본다는 것이다. 임윤찬은 작품번호 10번을 전체적으로 ‘빅뱅에서 시작해서 무로 돌아가는 것’으로, 작품번호 25번에 대해서는 “10번과 달리 개인적인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어서 쇼팽의 원숙미와 고독을 느낄 수 있다고” 조망하였다.

다음으로는 전체적인 느낌과 이미지를 특정하여 1번부터 12번까지를 하나의 서사로 풀어낸다. 작품번호 25-6번에서 7번으로 넘어갈 때가 가장 짜릿하다는 언급이나 10,11,12번을 하나의 컨셉으로 잡아 세상의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느낌으로 표현한 것 등은 12곡을 유기적으로 엮인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바라본다는 시선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렇게 12곡을 한 작품의 연곡처럼 대하는 것은 낭만주의의 이상을 가곡으로 실현한 슈베르트의 연가곡에 비견될 수 있다. 쇼팽 생전에 “슈베르트가 성악을 위해서 한 일을 쇼팽은 피아노를 위해서 했다”는 <라 프랑스 위지칼>에 실린 기사의 내용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두 번째 단계는 녹음할 24곡의 캐릭터를 다 다르게 나누어 각 곡마다 일정한 서사와 상상을 구체화하는 단계이다. 그런데 “저는 저의 이야기와 상상을 바탕으로 연주합니다”라고 밝힌 것처럼 임윤찬은 선배 연주가들에게서 영향을 받되, 참조의 대상일 뿐 궁극적으로는 임윤찬 고유의 이야기와 자신만의 상상을 바탕으로 각 곡의 서사를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1번과 2번을 대조시키며 1번을 빅뱅으로 인한 광활한 우주의 별과 마주하는 느낌으로, 2번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방이 날아다니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이는 악보에 충실하되 악보를 뛰어 넘듯이 선배 피아니스트들에게서 영감을 얻되 실전에서는 자신의 해석을 표출하는 모습으로서 ‘나의 이야기와 상상’이 만들어내는 자유함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자유로움에서 내가 흥미롭게 주목하는 또 하나의 지점은 그가 클래식 연주자들에게서 좀처럼 찾기 어려운 즉흥성에 관한 것이다. 임윤찬은 작년에 일본에서 쇼팽 에튀드를 5~6번 연주했었다. 그는 그 당시에 작품번호 10-2를 ‘어느날은 나방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어느날은 페달을 10분의 1만 밟으면서, 그때마다 다르게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이는 단적으로 임윤찬의 자유로움과 즉흥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는데, 제시카 듀첸과의 인터뷰 마지막에서도 “(오늘 연주는 오늘의 상상을 담고) 내일이 되면 또 다른 상상을 하게 되겠죠”라는 말로 마쳤다. 

이러한 언급은 20세기 초반 산조라는 장르를 개척했던 한국 전통음악가들의 자유로운 즉흥성과 겹쳐지는 동시에 공개연주회에서 즉흥연주를 심심찮게 펼쳤던 베토벤과 쇼팽의 시대로 돌아가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세 번째 단계는 디테일의 표현인데, 임윤찬의 경우 시적 상상력을 소리로 표현하고 그만의 고유한 개성과 해석을 가미하는데 있어 그 정도가 매우 과감하고 거침이 없다. 그 한 예로 임윤찬은 화음의 내성부를 외성부만큼 중요하게 여긴다. 내성부의 선율들을 선택적으로 뽑아내어 멜로디 라인이 성부를 옮겨가며 새롭게 생기거나 혹은 동시에 두 개 이상의 대위적인 선율을 구축함으로써 텍스츄어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또한 그동안 소외되어온 왼손의 가치를 오른손의 가치에 못지않게 복원시킴으로써 오케스트라적인 풍부한 음색을 구사하는데 있어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이번 에튀드 앨범에서도 이에 대한 무수한 예를 들수 있으나 지면상 한 두곡만 언급하고자 한다. 작품번호 10-8번에서는 43마디 두 번째 박부터 45마디까지 오른손 엄지가 담당하는 내성부에 G#-F#-E#-F#/ F#-E-D#-E로 이루어진 4음+4음의 동형진행 시퀀스(Sequence)를 이루며 그동안 숨겨져 있던 선율 라인을 만들어 내면서 이 곡을 잘 아는 이들의 귀를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한편, 이그나츠 프리드만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는 작품번호 '25-9'의 임윤찬 해석은 이 한곡만으로도 논문을 쓰고도 남음이 있다. 8마디의 왼손에서 악보에 적힌 음표를 바꿔 Eb-F-Bb 대신에 C-Cb-Bb으로 전개되는 반음 하행 라인을 만들고, 악보에 적힌 아르페지오를 없애고 동시화음으로 처리한 뒤 정작 바로 뒷마디인 9마디에서 왼손 첫음에 과감한 변화를 시도한다. 왼손에 음을 추가하여 펼친화음(brocken chord)로 첫 박을 강조한뒤 그 추동력으로 새로운 악구 진행에 드라이브를 거는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32마디에서는 템포 루바토를 과감하게 시행하면서 정작 33마디 아파쇼나토(appassaonato)부분에 표시된 포르테 시모를 정반대의 악상인 피아노로 처리하면서 반전을 꾀한다. 프리드만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임윤찬의 완벽한 테크닉 위에서 200프로 효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반전에 가까운 다이나믹의 전복을 통해 그가 말한 “적절한 타이밍에 예기치 않은 유머”를 던진 예는 작품번호 10의 8번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4음 연주이다. 임윤찬은 94-95마디에서 포르테시모로 아르페지오 연타로 연주하게끔 되어 있는 악보의 지시와는 반대로 포르테 시모 대신 여리고 가벼운 마르카토로 경쾌하고 사랑스럽게 마무리하는데 이 순간 이 곡을 잘 아는 모든 이들은 짧은 탄성과 함께 ‘이건 몰랐지?’ 하고 날리는 듯한 발랄한 유머에 절로 웃음을 짓게 될 것이다.

Classic Gallery 영상 캡처 

 

한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심정이 느껴진다는 작품번호 25-5번은 오른손 16분음표와 점 팔분음표로 이루어진 음형의 연속으로 시작하는 A부분에서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앞의 16분음표를 가벼운 트릴같이 처리하는데 비하여 임윤찬은 16분음표 음가를 제대로 지키면서 상대적으로 또박또박 하게 선율을 진행시킨다. 검지를 엄지 밑으로 교차시키는 짧은 단편의 연속 리듬이 펼쳐지는 오른손 알토 성부를 강조하여 내성부의 선율을 만들어냄으로써 오른손 새끼 손각락으로 연결되는 소프라노 성부와 함께 동시적으로 울리는 다성부 선율을 만들어 내고 있고 34마디부터 36마디에서도 그동안 인지되지 않은 선율이 내성부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역시 여느 피아니스트들이 중요하게 처리하지 않았던 왼손 엄지의 ‘G-F#--E-D#’ 라인을 살려낸 것이다. 

 

 

이러한 내성부에 숨겨진 선율들을 임윤찬이 강조하는 것은 단지 그가 느낌만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악보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해독을 거친, 즉 이성적 탐구를 기초로 노래하는 선율의 서정성을 살려내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렇듯 심장을 강타하는 느낌은, 철저한 선율 및 화성 분석을 토대로 대위법적인 다성처리 능력이 뒷받침된 것이다.

이상에서 4곡의 연주를 살펴보았는데 24곡에 대한 개성적이고 자유로운 해석을 자세히 언급하려면 책 한권을 쓰고도 모자랄 지경이다. 이는 유수의 현대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보기 드믄, 특히 콩쿨에 우승한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피아니스의 행보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러한 임윤찬의 연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콩쿨이 없던 자유로운 시절, 20세기 초의 피아니스트들이 지닌 개성적인 퍼포먼스와 연결된 것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리스트의 파워와 테크닉, 쇼팽의 시정과 노래성이 동시에 공존함으로써 19세기 피아노의 두 거장이 임윤찬 하나로 통합되어 환생한 느낌을 받는다. 테크닉과 예술성의 완벽한 조화야 말로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꿈꾸는 것 아니겠는가..

 

 

임윤찬의 연주가 매 순간 설레임과 기대감을 갖게 하는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음악도 새롭게 들리게 하고 다시 악보를 들여다보며 재해석에 대한 여러가지 시각을 고민하게 만드는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는 해석(Interpretation)이 단순한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닌 제2의 창작(Composition)이자 '새로움'(Novelty)을 창조하는 음악하기(Musicking)임을 수행적으로 드러낸다.

이번 지면에는 다루지 못했으나 임윤찬이 15세 때 라이브로 연주한 쇼팽 에튀드나 당대 함께 K클래식을 이끌고 있는 조성진의 에튀드, 또 그가 언급한 20세기 전반기의 거장들과의 비교 감상은 해석을 창작의 경지로 올려 상상력과 독창성을 본격적으로 논하게 만들고 연주와 해석의 넓은 바다가 펼치는 광대한 창조 세계를 경험하게 할 것이다.

이제 임윤찬은 내년 레퍼토리를 위하여 다가오는 여름부터 지난 10년 동안 숙성시켜온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공부에 들어간다고 한다. 가깝게는 굴렌굴드나 손민수의 연주가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또 어떤 잊혀진 거장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소환시킬지, 그러면서도 임윤찬 고유의 개성적인 연주가 어떻게 펼쳐질지, 벌써부터 궁금하고 설렌다. 임윤찬은 아무리 낯선 곡이라도 연주의 명징성과 호소력으로 사람들의 귀에 뚜렷이 각인되게 하고, 식상할 정도로 유명한 곡도 새롭게 재탄생시킴으로써 미적 즐거움과 ‘심장을 강타하는’ 감동을 인류에게 선사하는, 21세기 피아니즘을 선도할 특별한 피아니스트임에 틀림없다.

 

이소영(음악평론가, 음악연구소NUNC 소장)

 

임윤찬 [쇼팽: 에튀드]임윤찬의 데카 데뷔 스튜디오 앨범쇼팽 에튀드 Op.10과 Op.25 전곡 수록!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18세의 나이로 최연소 우승을 거머쥔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데카 레이블 데뷔 스튜디오 앨범 ‘쇼팽: 에튀드’(Chopin: Etudes)를 4월 19일 발매한다.알프레드 코르토, 이그나츠 프리드만, 요제프 레빈 등 임윤찬에게 큰 영감을 준 피아니스트들의 발자취를 따라 쇼팽 에튀드를 선정하였으며 에튀드 Op.10과 Op.25 전곡이 수록되었다.1960년대 데카에서 발매된 전설적인 앨범들을 오마주한 커버는 필름으로 촬영하였으며, 당시 데카 바이닐에 많이 쓰이던 로고를 적용하여 피아니즘의 황금기를 떠오르게 한다.

 

 

<임윤찬 전국 리사이틀 투어>


6월 07일(금) 서울 롯데콘서트홀
6월 09일(일) 천안 예술의전당 대공연장
6월 12일(수) 대구 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
6월 15일(토) 통영 국제음악당 콘서트홀
6월 17일(월) 부천 아트센터 콘서트홀
6월 19일(수) 광주 예술의전당 대극장
6월 22일(토)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이소영 음악평론가. 음악연구소NUNC 소장 themove99@daum.net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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