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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우석의 행복론 ②] 만남과 행복

기사승인 2023.06.26  18: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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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남이란

만남이란 인간과 인간, 인격과 인격이 관계를 맺게 되는 일종의 실존적 사건이다. 일반적으로 둘이 서로 마주침, 접함, 마주 봄, 데이트하는 것을 말한다. 둘 이상의 인격 혹은 인격에 준하는 어떤 존재가 관계를 맺는 실존적 사건이다.

현대의 대화 철학자인 오스트리아 출신 유태인 부버(M. Buber, 1878~1965)는 인간의 대화와 만남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그는 나-그것, 나-너, 나-당신을 인간의 세 가지 근원어(Grundwort)라 하였다.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마르셀(G. Marcel, 1814~1917)은 인간이란 궁극적으로 세계에서 소외를 극복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 세계(근대 이후)에서 소유(Haben)가 존재(Sein)보다 더욱 중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에리히 프롬, 『존재와 소유』 참고) 따라서 신체를 가진 구체적 인간은 나에게 마주 서 있는 것, 나를 가로막는 것, 내가 구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문제(probleme)가 아니라 내가 그 속에 있는 것, 본질적으로 나의 바깥이 아닌 내 안에 있는 신비(mystrium)에 관여해야만 하며, 이것이 곧 철학의 대상이다.

『존재와 소유』(Être et avoir; Sein und Haben, 1935), 『존재의 비밀』(Le mystère de l’être; Geheimnis des Seins, 1951) 그리고 『문제로서의 인간』(L’homme problematique; Der Mensch als Problem, 1955)에서 마르셀은 근대의 대상화된, 물질주의적-과학기술적 사고에 극력 저항한다. “소유”의 지평에서 타자가 더는 대상(“그”)이 아니라 “존재”의 지평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에서 경험되는 상대자(“너”)가 되는 사랑으로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와 나의 접촉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rencontre)이다.

이런 만남은 인생에서 극히 드문 일대사건으로서 친구간의 깊은 우정이나 연인의 사랑에서 잠시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너-관계이며 성실성(idelite)이 그 조건을 이룬다. 친구나 연인이 성실을 맹세할 때 나와 너는 하나가 되어 영원한 “우리”(나이면서 너)가 된다. 나아가서 마르셀은 “절대적 당신”인 신과의 결속을 진정 추구할 가치가 있는 삶의 가치라고 본다. 원래 만난다는 것은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에서, 의인적으로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 혹은 동물이 관계를 맺는 것도 만남이라 부른다.

 

2) 왜 만나나

인간은 죽는 존재, 아니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존재다. 그래서 그것을 직접적으로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불안해하고, 때로 공포를 느끼며, 걱정(심려)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이 무의미함을 자각하고 이에 대해 회의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은 타인을 만나게 된다. 만나서 모종의 위로를 받고, 자신의 걱정거리를 잠시 망각하며, 자신감을 찾아 안심하려는 것이다. 상대방을 공감하기도 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더 깊숙이 성찰함으로써 자신의 침체된 심리적 환경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이것이 곧 타인과의 소통(Kommunikation)이다. 소통이란 의사소통, 즉 타인과 나의 마음을 트는 일이다. 그 양상은 대화와 담론으로 나눌 수 있다. 대화는 상대방과의 동등한 상호 의견 교환이고, 담론은 일방적인 견해 전달이다.

 

3) 어떻게 만나나

그러면 만나는 수단, 혹은 미디어(매체)는 무엇일까? 직접 만날 수 없는 경우 차선책으로서 과거에는 편지를 이용하기도 했다. 편지는 써서 부쳐 다시 답장을 받기까지 일정한 시일을 요한다. 물론 여기에는 장단점이 있다. 전보는 빠른 시간 안에 전달할 수 있는 잇점이 있다. 반면 전화는 거의 동시적으로 만나면서도 직접 만나지는 않고 목소리(일종의 직접성)만 공유할 수 있다. 역시 장단점이 있다. 최근에는 카톡(소셜 미디어)이나 페이스북 등의 수단도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고전적인 방법은 직접 만나기다. 가장 대표적인 만남의 방식이다. 역시 장단점이 있다.

 

4) 만나서 어떻게 하나

두 인격체가 만나서 하는 일은 결국 이쪽과 저쪽이 의견과 마음을 나누는 담화다. 담화에는 두 사람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대화와 한쪽에서만 일방적으로 말하는 담론이 있다. 다음으로 글쓰기의 형식에 나타나는 독백도 일종의 만남의 모습을 하고 있다.

 소설은 전형적인 독백이다. 

영화 《어바웃 슈미트》, 《녹터널 에니멀스》, 《나는 영국왕을 섬겼다》 등에서 보이는 것 역시 바로 이 독백의 만남 형식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소 병리적 현상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인간의 자기반성의 형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일대일로 상대자가 대응하는 상호적 대화가 단연 대표적이고 바람직한 만남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https://tv.naver.com/v/1363373

 

 

 

그런데 나와 너의 만남과 대화에는 몇 가지 문맥이 있다. 우선 대화와 토론은 서로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견해와 상대방의 견해를 교환하면서 내실을 기하는 행위다. 이것은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자유로운 견해를 개진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을 “대화”(dialogue)라 한다. 이를 통해서 각자의 창의성을 발견하게 되고, 상대방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나의 생각은 더욱 풍부해진다. 혹은 상대방을 비판함으로써 나의 견해를 더욱 강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견해에 대한 상대방의 비판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재점검하거나 수정할 수도 있다. 일방적인 견해를 강요하는 “담론”(discus)은 정보를 신속하고도 효율적으로 전달하고 수용하도록 할 수 있다. 영화나 연극, 라디오나 텔레비전, 교회나 절의 설교와 설법 등이 이에 속한다. 수용자는 이에 대한 견해나 반박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

                 _Martin Buber

 

 

5) 만나는 대상

마틴 부버에 의하면 만남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그것”과의 만남인데, 그것이란 일차적으로 사물을 뜻하지만 반드시 사물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경우에 따라 사람도 그것이 되기도 한다. 내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 되는 사람은 실은 나에게는 인격이 아니라 단지 사물이라는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그 밖에 환경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은 사물이다. 그러나 사물이 가치가 적다거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사물이 없이는 나는 존재할 수조차 없다. 우리는 사물을 통해서 비로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사물은 인격이 아니다.

둘째, 나에게 상대자로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너가 된다. 나는 너가 됨으로써 진정한 인격이 된다. 나는 너가 되기 위해서, 너로 불리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부버는 말한다. 이것은 근대의 데카르트적 자아(코기토의 주체)가 그 자체만으로는 극히 추상적인 존재로서 너와의 만남이라는 구체적 상황 가운데서만 비로소 적극적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다. 나와 너의 관계란 사랑과 책임의 관계이며, 상호성, 직접성, 현재성, 집약성, 표현불가능성 등의 전제 조건을 필요로 한다. 부버는 나와 너의 관계 안에 있는 사람만이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와 너의 관계는 영속적이지는 않다. 나와 너의 관계는 변화를 겪거나 나아가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라는 신과의 관계는 변화를 겪지 않는, 영원한 관계라고 부버는 말한다.

 

6) 대화 네트워크

빌렘 플루서(1920~1992)는 특히 마틴 부버의 대화 사상에 힘입어 자신만의 독특한 소통학(Kommumikologie)을 전개한다. 그는 단순히 부버 사상의 재생과 대변에 그치지 않고 그와는 다소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즉 부버가 직접 만나는 것을 중시한 반면 플루서는 두 사람이 원거리에서 기술그림(영상?)을 통해 만나는 것을 매우 중시한다. 즉 원격소통(Telemathik, 遠隔疏通)을 기술그림이라는 새로운 수단을 통한 새 시대의 만남의 양식으로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원거리에 있는 사람을 대화 상대자로 만들 수 있으며 서로 이웃이 되어 소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정보를 교환하거나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또한 단순히 말과 글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소리와 기술그림은 물론 냄새 요소까지 첨부하면 그야말로 입체적인 새로운 만남과 이로 인한 긍정적 요인이 새로 도입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사회 전체가 이런 대화 네트워크의 형성을 통해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촘촘한 만남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플루서의 희망섞인 전망이 단순히 낙관적인 소망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만일 인간이 기술그림의 장치를 이해하지 못하여 그 위력에 대응하지 못한다면 “신문맹”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7) 결론

이 시대에 행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행복은 찾아지기도 하고, 찾아오기도 한다. 찾아진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찾는다는 뜻인 반면, 찾아온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행복이 스며든다는 뜻이다. 때론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행복이 오는 반면, 때론 그것을 잊고 자연스럽게 행위하고 살아갈 때 저절로 행복이 온다는 뜻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서로 만난다. 만나려고 한다. 만남으로써 행복에 다가서는 것이다. 만남의 방식과 그로 인한 영향은 행복에 대해 대단히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만남은 현대인에게 필수적이면서도 결코 쉽지 않다. 그럴수록 인격과 인격의 진솔한 만남이 요구된다. 그것이 쉽지 않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매일 만남을 이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끝)

 

-계속-

 

양우석 

충북 옥천 출생으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학에서 헤겔의 기술이해와 화해관심이란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상생연구소 서양철학부 연구위원으로 근무했다. 현재는 한남대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헤겔의 절대주의철학』(2005)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2018), 『인식의 상처와 치유』(필명 현욱, 2012), 『하르트만의 비판적 존재론』(2001), 『헤겔의 자연철학』(1998), 『인간과 기술』(1998)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인간과 기술』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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