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언자와 제사장 사이에서
1994년에 국악기 개량 문제를 가지고 동아일보 신춘문예 음악평론을 응모하여 1995년 1월 4일로 당선 소식을 접하였으니 얼추 음악평론가로 데뷔한 지 올해로 30년이 되었다.
비평이란 일이 주로 언급 주체인 내가 언급 대상인 타자를 관찰하고 평가하는 작업이라서 그런가. 부끄럽게도 내 자신의 글쓰기를 제3의 눈으로 내적 성찰을 시도하는 메타인지가 작동할 계기가 많지는 않았었다. 그러다 보니 내 평론하기가 30년이 되었다는 것 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올 한해도 분주하게 중반을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몇가지 이벤트가 나로 하여금 내 비평 작업에 대한 메타인지를 발동시키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는데 그중 하나가 내 평론과 윤중강, 전지영, 최유준 등의 평론 및 담론 작업을 고찰 및 비평하는 어느 메타비평에 관한 글(이수경, “음악비평의 이론과 실제-인간을 이해하는 한국음악비평을 향한 메타비평”)이었다. 다른 사람의 음악회나 기획, 연출 등을 언술하고 평가하는 일에는 익숙하나 논문 심사를 제외한 평문 자체가 집중적으로 조명받고 비평의 대상이 된 적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김춘미 당시 심사위원의 심사평 이후로 거의 없어서인지 나에게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내가 모르고 지나쳤을수 있겠지만, 그래서인가, 이수경의 글을 읽을 때 사뭇 긴장도 되고 신선하기도 하였다. 이는 한편으로 현재 한국음악평론계에서 메타비평이란 영역이 거의 전무하다는 현상을 반증하는 것이기 하다. 여하튼 이런 계기가 되어 이번 지면은 여름에 있었던 수많은 음악회와 축제를 뒤로 하고 ‘이소영의 평론하기’를 나 스스로 정리하고 초심으로 돌아가는 기회로 삼으려 한다.
1. 글쓰기의 한계
음악비평은 음악(혹은 음악하기)에 대한 글쓰기이다. 여기서 음악이란 음악 작품 외에도 음악활동과 음악환경, 음악담론 등을 두루 포함한다. 음악하면 작품으로서의 음악에 한정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나는 좀더 폭넓게 음악 활동 전반을 아우르고 음악의 수행적 성격을 강조하는 ‘음악하기(크리스토프 스몰, Musicking)'라는 말을 적용해왔다. 음악하기에 대한 언어적 활동은 음악의 ‘밖’에서 음악에 ‘대해’ 얘기하고 서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음악 현상이나 사람의 음악활동은 그 자체로서 다층적이며 입체적이고 모순적이다. 이에 비해 어떤 대상을 설명, 해석, 평가해보려는 언어적 비평 활동은 예리한 논리의 칼날을 높이 세우고 정합적 일관성을 가지려고 하면 할수록 다층적인 실재(實在)의 일면 밖에 보여주지 못하게 되며 단층의 한 켜만을 침소봉대하기 쉬워진다. 3차원의 세계가 2차원의 프리즘을 통해 걸러지는 과정에서 실재의 모습은 납작해지거나 일부는 돌출되고 나머지는 가려지는 왜곡이 발생하기 쉽다. 왜곡과 과장이 쉽다는 것, 이것이 언어적 표상(表象)의 제한성이다.
음악에 대한 글쓰기에서 항상 느끼는 어려움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음악 및 음악하기에 대한 언급이 언급 대상- 음악가의 활동, 연주, 작품, 담론, 기획, 감상 등- 의 입체성에 얼마나 근접하고 있고 그 대상의 역동성을 죽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칼날을 들이댈 수 있겠는가. 내가 이쪽 면을 부각시키고 있는 사이에 참된 가치의 하나일 수 있는 대상의 저쪽 면이 가차없이 부정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매스가 환부를 도려내고 생명을 살리는 칼로 작용할지, 환부를 도려내다 생명을 죽이는 칼로 작용할지 모를 일이다. 내 글쓰기에서 실제 그대로의 모습이 나의 언어적 활동에 의해 일그러지지 않을까. 그런 차원에서 지난 30년 동안 나의 글과 말이 논거가 생략된 불성실한 비판으로 대상에 대한 성실한 진술없이 언어적 폭력으로 행사된 적은 없었는지 통렬히 반성하게 된다.
2. 음악비평의 구성요소
비평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함’이라고 되어 있다. 이 정의에 의하면 ‘분석’과 ‘가치’를 논하는 것이 비평이다. 물론 예술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가, 아름다움과 추함 역시 시대마다 그 기준이 다를진대 무엇을 근거로 미적 판단을 할 수 있는가, 비평가의 미적 판단은 사실 비평가의 주관적 취향에 연동된 것 아닌가 등 사전적 정의의 각 단어에도 꼬리를 무는 미학적 질문이 떠오른다. 그러나 여기서는 비평의 방법론에 해당하는 분석과 가치 판단에 대한 언급만 한정하여 다룬다.
현대 한국음악평론의 시조격에 해당하는 이강숙은 “음악과 음악비평- 신작 비평의 문제점”(『열린 음악의 세계』)이란 글에서 비평의 구성 요건을, 기술(記述. description), 해석(interpretation), 평가(evaluation)라고 명시하였다.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이강숙이 언급한 ‘기술’과 ‘해석’이 포함되어야 하므로 음악비평은 음악하기에 대한 분석(기술+해석)과 평가(가치판단)로 이루어진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성 요건이 없는 나의 주관적 느낌과 판단을 열거하는 것은 감상문차원에서 머무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술할 것인가? 비평에는 맥락 비평, 메타비평, 현장 비평, 작품 비평 등이 있을 수 있겠는데 가장 많이 차지하는 음악비평은 일단 음악작품에 대한 소리 현상을 묘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묘사하는 바가 어떤 음재료인지를 파악해서 설명하는 작업인데 음재료(리듬, 선율, 음색, 화성 등)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단순한 기술이 아닌 해석으로 넘어가는 지점이 중첩된다.
나아가 해석이란 무엇인가? 해석은 작곡가나 기획자, 연출가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하여 그 의도가 이 공연(작품)에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평론가의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다. 작곡가나 기획자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숨겨져 있는, 혹은 다르게 읽혀지는 다층적인 의미(형식적 의미/ 문화적, 역사적 의미)를 포착하여 이를 드러내고 밝혀주는 것이다. 문제는 기술과 해석이 주-객관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공감과 타당성을 이끌어 내는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분석 혹은 기술 및 해석의 단계가 충실하지 않고 곧바로 평가로 들어갈 때 이 평가가 과연 정당한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겠는가?
기술 및 해석의 단계가 생략된 평가는 결국 ‘주체가 어떤 말을 했을 때 그 말이 객체에 내재하고 있는 어떤 특성에 대한 말이 아니고 주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에의 주관적 내지 독선적 의견’(이강숙, “음악과 음악비평”)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주체(비평가)가 객체(음악비평 대상)에 대해 언급(비평)을 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비평가가 이해한 내용과 음악관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인데 그만큼 ‘객관적’ 비평이란 것이 허구라는 것이다. 이는 비평가가 이러한 비평의 한계를 자각하면서 자신의 언급 행위를 제3의 눈(inner-sight)으로 객관화시키는 통찰과 성찰적 인식이 항상 요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비평가의 가치판단 혹은 평가가 비평 대상이나 제3의 위치에 있는 청중이나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그 선행조건으로서의 기술 및 해석, 즉 분석(=구조적 들음)이 내실 있게 전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비평이란 객관적 미적 판단에 근거가 되는 진리값은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은 좋은 비평과 나쁜 비평을 판단하는 것은 설득력값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평가의 설득력값은 기술과 해석의 설득력값에 연동된다.
3. 비평가의 역할 - 제사장과 예언자(선지자)
나는 평소 비평의 역할을 성경에서 예언자와 제사장이라는 두가지 축을 수행하는 음악하기로 스스로 규정해왔다. 30년 전, 젊은 청춘의 비판적 정신으로 고무되었던 시절에 평론이란 성서에 나오는 아모스나 이사야와 같은 예언자적 역할을 자임하며 주류사회의 타락과 기득권 세력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촉구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나름의 ‘소명 의식’을 가지고 출발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죽은 자와 산자를 매개하고 하늘과 땅을 매개하며 양자를 소통시키고 통합하는 매개자로서의 제사장(=사제) 역할이 비평의 사회적 역할에서 새삼 중요해짐을 느낀다. 그렇다면 무엇을 매개하고 통합할 것인가? 생산자와 수용자 사이를 매개하고 양쪽의 미적 과정의 상호 역동성을 통합하는 것이다. 맥락과 작품의 숨은 의도를 읽어낼 뿐만 아니라 미처 의도하지 않으나 함축된 의미를 드러내고 수용적 맥락에서 완성되는 예술적 가치를 읽어내는 것이 그것이다.
궁극적으로 생산자들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공연 예술을 무대에 올렸으나 결과적으로 좌절할 때는 그 긍정적인 의미를 읽어주며 용기를 주고 나르시즘에 빠져 도취되어 있을 때는 준엄하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며 각성시키는 역할을 할 때 예언자와 제사장 사이에서 양쪽을 오가는 음악 비평의 좌표가 설정되는 것이리라.,.
4. 나는 누구를 향하여 글을 쓰는가?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전환되는 근대의 끝에서 평론을 시작했으나 이제 영상문화가 대세가 된 시대에 살면서 평론의 역할과 사회적 기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사석에서 “아무도 안 읽는 글을 왜 쓰나? 요새 누가 글을 읽나?” 라는 말을 많이 듣기도 하고 나 스스로 글을 쓸 때 요즘 세상에 누가 내 글을 읽을까? 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에서는 비평과 담론의 죽음을 얘기하며 평론가들의 무능함과 무책임함에 대한 날 선 비판의 목소리가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에서는 문자문화의 종언과 함께 비평의 무용론 역시 광범위하다.
극단적으로 나의 글쓰기는 다수를 위한 글이 아니라, 한 사람을 위한, 한 사람을 향한 글이다. 그 한 사람은 기획자나 작곡가 혹은 연출자일 수도 있고 깨어있는 진지한 청중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공연예술 현장에서 뭔가를 생산하는 그들을 향한 의미 드러내주기, 잘못할 때의 뼈아픈 비판, 잘하고 있을 때의 따뜻한 응원과 격려 등 나의 눈은 먼저 문화생산자들을 향해 있다.
이 땅의 음악가, 혹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향해 건너기 힘든 강을 건널 때 함께 동행하고자 하는 나의 지향점은 『이소영의 음악비평- 생존과 자유』(2006)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고 그 글을 쓴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의 시점에서도 이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기에 서문의 인용으로 나의 비평을 향한 변을 가름한다.
“비평적 글쓰기를 하면서 내 스스로 힘들게 대면해야 했던 모순적 현실은 바로 ‘생존’과 ‘자유’ 사이의 갈등이었다. 한국전통음악이 21세기 현대사회에서 새로운 전통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데는 그 누구에게도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듯 하다. 문화산업이 지배하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국악의 ‘생존’을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수많은 음악인들을 본다. 창작국악, 퓨전국악, 탈 산조적 음악하기 등 이 책에서 거론된 수많은 시도들은 1차적으로 이러한 생존을 위해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많은 시도들이 단지 생존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술가라면 응당 지녀야 할 또 다른 가치로 상정되는 것이 있으니 기존의 관습과 권위에 얽매이지 않은 음악적 자유를 통한 비상(飛上)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소비대중문화라는 문화적 대기권에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국악의 ‘생존’과 ‘자유’를 평화롭게 공존시킬 만큼 녹녹치 않다.
(--중략--) 음악비평가로서 내가 고민했던 것은 예술가의 순결한 영혼을 더럽히지 않으면서도 즉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자유롭게 펼치면서도 생존의 문제에서 허덕거리지 않는 비전과 방법을 어떻게 함께 모색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예술적 자유와 예술적 생존이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통일 속에 화해할 수 있는 날을 나는 아직도 꿈꾸며 이 책이 그 강을 건너는 작은 징검다리라도 될 수 있기를 바란다.”(이소영, 『생존과 자유』, 서문 중에서)
이소영 음악평론가 themove99@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