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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현의 소리비평] 가상악기 시대, 한국음악의 새로운 기회

기사승인 2022.09.09  1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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꽹과리 가상악기

오래 전, 중학교 때 처음 가지게 된 전자 건반에는 백 개가 넘는 음색이 내장되어 있었다. 피아노, 오르간들에 이어 (주로 서구의) 찰현, 발현, 목관 및 금관 악기들이 주욱 있었고 그 뒤에 타악기들이 있었는데, “taiko”, “koto”라고 적혀있는 낯선 이 소리는 뭘까,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알고 보니 일본의 북 태고와 발현악기 고토였다. 기억으로는 샤미센도 있었다. 알게 된 뒤 “왜 한국 악기는 안 들어있을까?”라고 생각하며 괜히 기분 나빠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건반의 제작사가 일본에 기반을 두고 있는 곳이었으니 딱히 이상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십수년 뒤 지금, 한국에서 지금 생산하고 있는 전자 건반들의 내장 음색에 한국 악기들이 있는가?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없다. 그렇다면 그건 여전히 이상하거나 혹은 아쉬운 일일 수 있다.

그때와 지금 사이, 음악을 연주하고 창작하고 발표하는 이들의 세계는 엄청나게 변화했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실제” 악기연주로 꾸려지는 소리와 장르의 세상은 여전히 유효하고 큰 의미를 지니지만, 실제 연주로만 구현 가능할 것이라 여겨지던 영역의 많은 부분은 전자 장비와 가상악기 소프트웨어의 몫으로 넘어와있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팝 음악의 경우, 원 악기의 소리를 받아 디지털 악기의 인터페이스 속에 녹여 처리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거나(샘플링 악기) 아예 진동과 공간을 이론적으로 합성하고 조작하여 원하는 음향을 만들어내거나(알고리즘 모델링 악기 및 신시사이저) 하면서, 흔히 말하는 “리얼 녹음”이라는 것이 단 일 퍼센트조차 들어가지 않은 경우가 아주 많다.

대금 가상악기

작곡가들은 지역, 장르, 관습 등으로 경계져있던 음색들을 가상 악기(VSTi)를 통해 물리적 한계 없이 실험적으로 섞어쓴다. 그 과정에서 지금껏 겪지 못한 새로운 소리가 나온다. 컴퓨터 앞에 앉아 무한히 새로운 음색을 만들 수 있다고 해서 기존 악기들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외려 글로벌 음악산업에서 유리되어 있던 세계의 “전통적” 악기와 그 음색들이 “힙”한 요소나 재료로서 받아들여진다.

케이팝 산업이 확장을 거듭해가면서, 시각적, 청각적 컨셉트의 하나로 전통음악 요소의 부분적 활용도 점점 눈에 띄게 늘어가고 있다.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시각적 컨셉트는 명시적으로 한국 전통 요소의 차용인데, 지금 나오는 음색과 주법과 선법은 중국 악기스러운데?”와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안타까운 상황들도 존재한다.

창작자로서 마음에 드는 음색을 위해 기존의 것을 변형하는 것은 문제될 일이 없지만, 앞의 예와 같이 의도치 않은 셀프-오리엔탈리즘적 오류(예컨대 서구의 미디어에서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인접국의 이미지들을 쓰는 오리엔탈리즘적 오류의 “셀프” 버전)를 범함으로써 작품 전체를 실패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음악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고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늘면서 작곡가들도 전통 악기를 더 세련되게, 더 존중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게 될 것이다.

전주대의 “삼현육각”을 비롯, 한양대, 서울대 등에서 샘플링에 기반한 국악 가상악기 제작을 위해 노력해왔고, 국립국악원에서도 여러 악기의 터치들을 각각 녹음하여 제공하고 있다. 십수 년 전 전통 장단에 기반한 곡을 쓸 때, 인터넷에 떠돌던 북 소리 파일들을 타임라인 위에 조각조각 마우스로 붙여가며 부자연스럽게 작업했던 기억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었다. 이러한 가상 악기들이 보다 더, 정책적인 지원과 함께 발전하고 나아가 작곡가 및 지망생들의 세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상업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중국, 일본, 인도, 인도네시아 등의 전통악기들처럼 유, 무료의 고품질 가상 악기를 쉽게 찾을 수 있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해외 기반의 몇몇 회사가 “동아시아” 혹은 “월드”와 같은 이름의 패키지 안에 한국 악기들을 포함시킨 바 있고 필자도 종종 사용하지만, 악기에 대한 이해가 없어 소스 녹음 자체를 잘못하였거나, 훌륭한 소리 소스를 녹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법에 대한 지식이 없어 인터페이스가 이상하게 꾸려진 경우들이 있다.

전통음악 장르 안에서 곡을 쓰는 이들을 비롯하여 전통음악의 요소를 즐기고픈 비전통음악 창작자들이 마음껏 “갖고놀” 수 있도록, 더 많은 발전이 있기를 바란다. 종국에는, 어린이들이나 비음악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글 초두에 언급한 바 있는 음색을 내장한 종류의 건반악기에도 (한국 회사부터) 국악기 음색이 어엿이 있어 그 소리들과 친해지며 놀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박종현 뮤지션, 기획자(월드뮤직센터) themove99@daum.net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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