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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_윤중강의 국악비평] 정소희가 소리로 알린 '대금산조 4大 유파’

기사승인 2025.03.10  01:5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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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지역성과 장소성을 더욱 고려해야 한다

연주가 있어, 평론이 있다. 뛰어난 연주를 평(評)함으로써, 더 훌륭한 연주가 이어질 수 있다. 평론의 역할이 그렇다. 2025년 2월 20일,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펼친 정소희의 대금독주회는 대한민국 산조 연주사(史)에 뜻깊게 기록해야 한다.

공연 제목은 <소리의 기억, 산조의 생명력>.

정소희는 왜 ‘소리’를 맨 앞에 내세웠을까. 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말과 글이 아닌 대금산조의 소리로 그때의 기억을 이어본다.” 이런 ‘소리’라는 단어를 또 ‘기억’과 연결했다.

 

 

‘소리의 기억’ 그리고 ‘문장의 기록’

주자(奏者)의 ‘소리의 기억’엔 평자(評者)의 ‘문장의 기록’이 따라야 한다. 공연기획자 한덕택은 ‘물 흐르듯 연주하는 여유와 공력’이란 한 마디로 정소희를 극찬했다. 그러니 여기서 그의 출중한 연주를 다시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다. 평자로서 나는 무엇을 기록해야 할까. 각각의 명인의 대금과 관련된 삶을 정리하겠다. 이를 통해서 이제까지 산조를 채보하고 악보를 중심으로 음악적 특성을 파악하는 한계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산조를 채보한 악보에선 지역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비유는 어떨까. 같은 국어책을 전국의 여기저기서 읽는다고 하자. 교과서에 기록된 글자는 모두 같다. 그러나 지역마다 발음과 억양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악보 중심으로 산조를 습득한 이들의 한계가 바로 그렇다. 그들은 우조, 계면조, 평조 등 조성 위주로 차이는 분명히 연주하려고 하지만, 정작 산조에서 원론적으로 중시해야 할 산조의 근간이 되는 지역성은 무시한다. 어떤 연주자는 특정 산조를 배태한 지역성과는 전혀 동떨어진 연주를 하는 셈이다. 채보의 맹점과 연주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나는 현장에선, 정말 ‘000류’라는 호칭이 무책하며, 000명인에게 죄송한 마음마저 든다.

정소희는 연주를 통해서 네 명의 대금 명인을 지역성에 잘 드러내려 했다.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국악계에선 대개 ‘경기제’와 ‘남도제’로 이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더욱 세분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 연주한 4인의 대금산조의 뿌리는 박종기이다. 박종기의 영향을 더 받은 2인이 있고, 덜 받은 2인이 있다. 전자는 한주환과 한범수, 후자는 이충선과 김광식이다.

 

한범수_1978 세종문화회관 개관기념 프로그램북

 

박종기 ‘방송의 대금’

박종기(1879~1941)의 본적은 전남 진도군 의신면 도계리. 진도에서는 일찍이 유명한 박종기라는 존재가 당시 전조선(全朝鮮)에 널리 알려진 건 언제일까. ‘전조선명창명기합동음악대회’가 1926년 11월 19일부터 사흘간 목포에서 열렸다. ‘적독주(笛 獨奏) 박종기(진도)’로 그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적(笛)이란 대금이다. 박종기는 대략 이즈음 서울서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1928년 11월 21일부터 사흘간 우미관(관철동)에서 열린 유성기음반회사 일축(日蓄)이 주최한 명창명인공연에도 박종기는 이름을 올린다.

당시 가야금산조는 널리 통용되고 있던 시대였으나, 대금산조라고는 확실히 명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봉장취(봉작취)’와 같은 산조와 유사한 형태의 음악이 존재했으며, 1930년대 후반에는 ‘대금산조’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따라서 대금산조의 역사는 백 년으로 보는 게 맞다.

 

박종기(우, 대금)와 김종기 (좌, 가야금)

박종기를 사숙(私淑)한 두 명의 예인

박종기는 1925년경 상경(上京)해서 1940년까지 대략 15년 정도 활동을 한 것 같다. 경성방송국(JODK)에는 1940년 5월까지 출연한 것이 확인된다. 당시 경성방송국에서 활약한 국악연주자에는 동명(同名)의 두 종기가 있다. 한 사람은 대금의 박종기요, 또 한 사람은 가야금의 김종기(1902~1940)다. 두 사람이 경성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이 존재한다.

한범수 1960년대 국악예술학교 소풍. 한범수는 앉아잇는 가운데 안경. 앉아서 가방을 가로로 맨 사람이 정권진 (판소리, 인간문화재) 그 뒤에 안경쓰고 지팡이 든 분 신쾌동. (거문고, 인간문화재)

 

한주환과 한범수는 생전 구술을 통해서 박종기의 대금을 방송과 유성기음반을 통해서 접하면서 그를 모방하며 독공(獨工)했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박종기를 만나게 된 것이 큰 행운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두 사람이 박종기를 오래도록 만나서 배운 것은 아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레슨’의 개념이 분명했던 시절이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박종기의 대금산조를 이렇듯 2인에게 이어졌으나, 그들이 결과적으로 만든 산조는 다르다. 한주환은 전형적인 ‘전남제’이고, 한범수는 ‘충청제’라 함이 맞다. 박종기를 만나기 이전, 그들의 출생과 음악적 기반이 기본적인 음악적 DNA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충선 선생님. 성실 근면 표본 거문고 제외 자신이 다루는 악기를 모두 놓고 찍은 사진.

거문고 안 배운 이유.재주가 열가지면 빌어 먹는다 

김광식과 이충선은 경기 남부 출신이다. 모두 ‘경기제’에 뿌리를 두었으나 이 또한 성격이 다르다. 김광식의 음악에서 부부의 연을 맺은 박초월의 전라도적 영향을 간과할 순 없다. 이충선은 경기도 광주 출신이나 일찍이 상경해서 방송에 주력했다. 아주 분명히 해둘 게 있다. 이 시절 그는 대금을 연주했기보다는 피리와 해금에 주력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어떤 한 산조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지역성’과 함께 그 연주자가 활동했던 음악적인 영역 곧 ‘장소성’을 결코 간과할 순 없다. 이에 따라서 살피면 네 사람의 대금산조는 더욱 분명히 차이를 알게 된다.

 

한주환

한주환의 ‘국극의 대금’

한주환(1904~1966)의 출생지는 전남 화순군 동복면 한천리 55번지. ‘한천농악’으로도 유명한 고장이다. 한주환의 별명 “뛰” “띠”라 했다는데, 농사일을 마친 한주환이 늘 저녁이 되면, 어디선가 대금을 불었기에 동네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한주환류를 들으면서, ‘박종기제와 한주환류가 비슷하다’면 그건 당연히 박종기의 영향이다. 그러나 ‘박종기제와 한주환류가 다르다’면 그건 한숙구와 한수동父子의 영향으로 짐작해도 좋겠다. 실제 한주환은 박종기와의 인연이 깊다기보다 이들 부자와 인연이 더 깊다. 국악계에선 일반적으로 한숙구와 한수동 부자는 가야금명인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대금도 잘 불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야만 당시 풍류가 특히 성한 화순의 율방(律房)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일찍이 박종기는 워낙 대금에 출중해서 ‘절대 종기’라는 별칭이 있었다. 한주환은 동복오씨(同福吳氏), 곧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의 율방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소작농제도가 없어지면서 동복오씨의 재산가들이 몰락하게 되면서 한주환의 음악적 방황은 시작된다.

 

이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한주환이 선택한 것이 여성국극 악사였다. 당시 여성국극은 가장 핫한 장르였고, 여성국극의 악사가 되면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살았다. 이른바 ‘마이깡’ 즉 선불로 여성국극 악사를 스카웃하던 시절이었다. 한주환은 한 때 여성국극 최고의 스타 임춘앵이 이끄는 단체인 ‘여성국악단 임춘앵’에서 활약했다. 김금암(김병호, 가야금) 정달영(아쟁), 한주환(대금), 오진석(피리), 김세준(장구)이 한 팀을 이뤘다.

여성국극의 전성기를 지나서 한주환이 1960년대 초에 정착한 곳은 청진동, 거기서 이른바 당시 표현을 빌리면 ‘구멍가게’를 했다. 넉넉하지도 않지만 부족하지 않았던 말년이었다. 한주환이 마지막을 머문 곳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진동 235번지. 지금의 광화문 KT빌딩 뒤편이며, 당시에는 해장국집이 많았던 골목이다.

 

김광식의 ‘극장의 대금’

한주환 이후 주목해야 할 대금은 김광식(1911~1972)이다. 두 사람은 평생 대금에 집중한 연주가이고, 매우 출중한 기량을 지녔다. 하지만 제자양성엔 소홀했다. 말을 바꾸면 당시 공연활동이 너무도 많아서 제자를 키울 시간적 이유가 없다는 설이다. 

 

한주환, 김광식  

이 두 산조의 역사적 가치에 비해서 전승이 활발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정소희가 두 산조를 무대에 올렸다는 건 뜻이 깊다.                      

 

 

2025년 올해는 국악관현악 6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악단인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탄생에 있어서 ‘음악적 주역’은 단연 지영희다. 거기에 한 사람을 더 꼽는다면 주저할 것 없이 김광식이다. 초창기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지휘자는 지영희, 악장은 김광식이었다.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과 함께 기억할 대금연주자가 김광식이다.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악장으로서 맹활약했기에 그렇다.

 

지영희, 김광식, 이충선은 평생 의형제로 지냈다. 여기에 한 사람을 더 꼽는다면 장구의 이정업이다. 지영희의 아내이자 가야금연주가인 성금연을 포함한 5인이 한 팀을 이뤘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서 방송과 무대에 가장 많이 오른 민속악의 드림팀이다.

참고로 김광식의 형은 김광채, 이충선의 형은 이일선이다. 김광채는 한성준이 이끄는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중요 멤버였다. 처음에는 연주가로 출발했지만, 점차 기획자의 역할로 전환하였다. 이충선과 이정업은 둘 다 김광채 집안의 여성과 혼인했다. 따라서 처남 매부간이 형성됐다.

김광식의 대금은 ‘극장의 대금’이다. 한주환의 ‘국극의 대금’이 대단했지만, 그가 무대 위에 올라서 대금을 연주하는 건 아니다. 김광식은 달랐다. 무대 위에서 대금을 연주했다. 김광식은 ‘지영희 일행’의 출중한 대금연주자로서 수많은 무용음악도 녹음했다.

김한국. (김광채의 아들) 작은아버지 김광식에게 대금을 배움. 1981년 대한민국국악제 프로그램북 사진

1970년대 초, 동양방송의 국악프로그램 <TBC향연>은 매우 유명하다. 이 프로그램의 전속악사가 ‘김광식 일행’이었으나 안타깝게도 1972년에 타계했다. 김광식의 대금은 김한국으로 이어졌다. 김한국은 김광채의 아들이다. 김한국은 1980년대 주로 굿판이나 무대공연에서 활약했으나 개인발표를 하진 않았다.

 

이충선의 ‘녹음의 대금’

이충선(1901~1989)은 경기도 광주출신이다. 이일선, 이충선 형제는 일찍이 서울로 올라와서 활동했다. 방송과 굿판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충선은 1933년부터 경성방송국(JODK)에 출연했다. 우리나라 국악인이 대개 방송을 통해 활동했으나, 그 공헌도와 연주 기간에서 월등한 연주가가 이충선이다. 이충선은 1987년까지 KBS에 출연했다.

대한민국에서 50년 넘게 공영방송(JODK, HLKA, KBS)의 악사로 활동한 이는 이충선이 전무후무할 듯 싶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이충선 명인이 KBS사장에게 보낸 편지는 유명하다. 자신은 이제 노쇠(老衰)하여 피리를 불 수 없으니, 앞으로는 더 이상 자신을 부르지 말아 달라는 일종의 사직서(社稷署)와 같은 편지였다.

이충선은 JODK 시절 해금을 주로 연주했고, 피리(세적)도 연주했다. 그가 대금을 연주한 적은 거의 없다. 그가 국악계에 두드러지게 공헌한 건 경기도 굿음악을 기반으로 한 ‘피리시나위’를 남긴 것이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서 지금의 ‘이충선류 피리산조’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충선류 대금산조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이충선의 대금산조가 널리 알려진 것은 1973년 이후다. 평생 의형제로 지냈던 김광식의 타계 이후다. 지영희 일행은 여러 악기를 잘 다루었지만, ’대금은 김광식, 피리는 이충선, 해금은 지영희, 장구는 이정업‘이란 규칙은 거의 깨지지 않았다. 여기에 성금연의 가야금이 함께 했다.

이렇게 5인을 기본으로 공연을 다녔으나, 야외연주나 국가행사 등에는 7~8인으로 늘었다. 이럴 때는 성금연은 아쟁을 연주했고, 가야금은 서공철(서달종)이 연주했다.

 

방용현의 대금을 이은 이충선의 대금

이충선의 대금스승은 방용현(方龍鉉)이다. 피리 해금를 두루 잘 다뤘던 이충선은 대금의 명인 방용현을 만나게 된다. 한성준은 조선음악무용연구회(1937)를 결성하기 전에도 무용음악에 치중했다. 당시 ‘화랑무’란 것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시절 무용반주를 한 ‘한성준 일행’은 대개 장구의 한성준, 대금의 방용현, 세적(피리)의 임학준, 해금의 김인호이다. 

한성준이 조선음악연구회를 발족할 즈음, 연주자 2명이 교체하게 된다. 해금과 세적(피리)연주자가 교체되었다. 해금은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함께 발기한 김덕진이 맡았고, 세적(피리)은 이충선이 맡았다. 이즈음 이충선은 당시 서울지역에 가장 인정하는 대금의 대가 방용현과 함께 활동하개 돠는데, 공연활동 중 짬짬이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대금을 연마했다.

이충선은 실제 거문고를 제외한 모든 악기를 다 다를 줄 알고, 많은 산조를 녹음했다. 이러한 녹음을 바탕으로 이충선의 여러 악기 산조가 알려졌다. 이충선은 오직 거문고만을 다루지 않았다.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악기를 다 다루면 결국 빌어먹게 된다”는 민속악계의 속설에 연유한다.

 

여기서 잠시 필자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하나 얘기하겠다. 이충선의 방송활동에 주력한 얘기이기에 남기려 한다. 1978년 나는 대금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현대민족무용학원을 하는 석운 윤병하(1924~2008)의 소개로 이충선 명인을 찾아가게 되었다. 현대민족무용학원 (중구 회현동 1가 25번지)에서 대금을 챙겨서 송파로 향했다. 당시 송파산대놀이 전수소까지 가는 길은 버스로 꽤 멀었다. 당시 송파의 비포장도로의 진흙탕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전수소에 도착했는데 정작 이충선명인은 안 계셨다. 거기에 있는 직원은 ‘방송하러 가셨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이충선은 평생 방송활동에 주력하면서 성실하게 산 분이다. 어려운 사람을 챙길 줄 아는 분이기도 했다. 이충선의 양아들이 김찬섭이다. 이충선은 자신은 민속악을 했지만, 정악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양아들에게는 국악사양성소를 권유했다. 이충선의 주 종목의 악기가 피리이듯, 김찬섭도 이충선의 뒤를 이어서 피리와 태평소를 잇기에 충실했다. 이충선이 KBS 에 츨연을 하며 방송에 주력했듯이, 김찬섭도 KBS 민속합주단의 멤버로서 활동했다.

 

이충선의 대금은 그의 삶과 연관해서 ‘녹음의 대금’ 혹은 ‘마당의 대금’이라고 하겠다.

이충선의 다양한 기예를 알고 있는 당시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에선 이충선이 다루는 모든 악기를 녹음하려 했다. 명인은 이를 거절하지 않고,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여러 악기를 녹음했다. 그렇게 해서 이어질 수 있는 음악이 바로 오늘날의 ‘이충선류 대금산조’이다. 이충선은 송파산대놀이 전수소에서 대금을 가르쳤다. 1970년대 중반은 사회적으로 피리보다는 대금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당시에 서서히 대금동호회가 생기기 시작했으나, 피리동호회는 없었다.

 

한범수의 ‘교육의 대금’

한범수(1911~1984)는 충남 부여 출신이다. 그는 연주자로서의 활동보다는 교육자로서의 활동에 더욱 치중했다. 민속악 명인 중에서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와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중고등학교)에서 실기를 모두 지도한 이는 드물다. 기악명인 중에서는 한범수가 거의 유일하다.

한범수는 왜 연주보다는 교육에 치중했을까. 그의 성향이기도 하지만, 다른 배경도 무시할 수 없다. 국악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전라도 출신의 악사끼리 뭉치고, 경기도 남부 출신의 악사가 뭉쳐서 한 팀을 이뤄서 활동했다. 따라서 충청도 출신의 한범수가 함께 활동한 영역은 많지 않았다. 그룹 활동에서 거의 배제된 교육에 치중했다. 그의 공연활동에서 중요한 것이 리틀엔젤스(선화어린이무용단)이다. 초창기 리틀엔젤스 무영단의 반주자로서 국내와 해외에서 많은 공연을 했다. 리틀엔젤스의 창단 당시 음악과 무용을 주도하면서 단장 역할을 했던 이는 박성옥이다. 일제강점기 무용가 최승희의 반주를 했으며, 초창기 여성국극 최고의 히트작 햇님과 달님의 악사가 박성옥이다.

리틀엔젤스의 초창기에는 박성옥 (장단)과 함께 한범수(대금, 단소)과 서공철(가야금, 양금)이 큰 역할을 했다.

한범수는 원래 충청도 지역에서 단소로 유명했다. 이러다가 박종기 음원을 통해서 대금산조를 만났고, 이를 바탕으로 피리, 해금산조로 영역을 넓혔다. 한범수는 퉁소에도 관심을 두었다. 단소로 시작한 그에게 유사한 종적(縱笛)인 퉁소는 매우 매력적이 악기로 다가왔던 것 같다.

 

모방에서 창조로 향해간 ‘충청제’의 매력

한범수의 음악은 ‘충청제’의 묘한 매력이 담겨 있다. 여러 지역의 음악을 섭렵하면서, 그 안에 독특한 지역적 정서를 담아내는 건 충청제의 전반적인 특성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충청 출신의 연주가들은 이런 능력에 출중해 보인다. 일제강점기 충청도와 연관된 산조의 명인은 심상건을 비롯해서 박팔괘, 박상근 등이 있다. 이른바 ‘웃다리’라고 불리는 충청도는 서울 경기의 중심과 전라도 사이에서 각 지역의 특성을 두루 포용하면서 충청도만의 정서를 만들아냈다. 한범수는 ‘모방을 통한 창조’의 달인이다. 박종기와 한주환의 대금가락을 근간으로 유동초의 태평소 가락을 더해가면서 점차 자신의 산조를 완성해 갔다.

 

한범수 명인이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연주회는 무엇일까. 세종문화회관 개관기념 예술제이다. 1978년 4월 29일, 소강당(현 M시어터)에서 ‘산조음악’이란 이름으로 한범수 명인의 대금산조와 한갑득 명인의 거문고산조를 명인의 직접 연주로 들을 수 있었다. 여기에 시나위까지 합쳐졌다. 한범수 명인은 안타깝게도 무형유산(당시 무형문화재)의 보유자(인간문화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타계했다. 박종기에서 시작된 산조는 ‘소리 더늠’과 ‘시나위 더늠’으로 나뉜다. 대금산조의 무형유산(무형문화재)로 일찍이 지정한 강백천과 다른 ‘소리 더늠’의 특징이 한범수에게 있으나, 그것이 무형유산으로 지정받지 못한 건 매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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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은 소리로 기억되고 이어진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음악은 글로 기록되고 판단된다” 또한 맞는 말이다. 대한민국에 정소희와 같은 연구와 연주를 병행하는 대금연주자가 있다는 건 매우 기쁜 일이다.

 

4인의 명인을 깊게 들여다본 정소희의 시각

2025년 정소희의 대금산조의 네 유파 연주회를 접하면서, 40년 전이 떠올랐다. 1985년, 이 때는 서용석 명인과 이생강 명인이 활약을 하고, 원장현류 대금산조가 새롭게 주목을 받았지만,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많은 대학의 졸업연주회나 신문사 주최 신인음악회에서의 대금은 거의 한범수류였다. ‘한주환류’ ‘김광식류’는 꿈도 꾸지 못할 시절이었다. 지난 40년 동안 이런 산조를 발굴하고 복원한 대금연주자가 노력한 결과다. 이런 ‘희귀 산조’를 무대에서 연주하는데 더욱 정진해온 정소희의 열성에 탄복한다.

이번 4인의 대금산조의 유파를 한 무대에 올린 정소희는 이 시대를 가리켜서 “여유롭지 않던 그 시절. 하지만 음악만큼은 풍요로웠던 그 때”라고 했다. 

무형문화재 (현, 무형유산)에 대한 관심은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지만, 종묘제례악 판소리 산대놀이 등에 비해서 기악의 관심은 적었다. 특히 거문고와 가야금에 비해 관악기(피리, 대금, 해금)은 더욱 그랬다. 이런 시대에 올곧게 기악에 정진한 분들의 음악을 깊게 들여다본 정소희는 여러 면에서 긍정적 본보기가 되어 주었다.

이 연주회를 통해 정소희는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정소희는 이런 의문을 던진다. “2세대 대금산조 명인들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직답(直答)은 아니나, 각자의 명인들의 음악적 특징을 깊게 알기 위해선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다.

 

4인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첫 번째 중요한 것이 ‘지역성’이다.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장소성’이다. 대금산조는 지금 우리가 정소희 대금독주에서 산조를 듣는 것처럼, 그렇게 ‘일인 연주의 감상용’으로 확실하게 존재한 건 아니다. 대금산조의 음악적 편린(片鱗)은 여러 장소에서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했다. 여성국극에서, 국악관현악에서, 연희에 초점을 둔 마당에서, 때론 관객이 없이 스튜디오의 기록용 녹음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 이런 음악이 당시 어떻게 기록되거나 소통되었는지를 잘 살피는 것은 각 산조의 유파별 특징을 정확히 알리는데 큰 계기가 될 것이다.

 

채보된 악보에서는 알 수 없는 지역성을 발견해야

음악에서 지역성은 무엇일까. 언어로 치면 사투리와 같다. 국악에서는 토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토리는 한 지역의 고유한 음악적인 언어, 혹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사고로 말한다면 음악적 방언(Musical Dialect)이다. 네 사람의 연주는 궁극적으로 ‘토리’의 유사함과 차이함을 통해서 결정되어야 사실이다.

많은 연주자가 채보된 악보를 중심으로 산조연주에 충실하다. 유파마다의 ‘가락의 차이’를 통해서 그 산조의 특징과 매력을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산조에서 중요한 건 ‘가락의 차이’가 아닌 ‘표현의 차이’다. 그게 바로 산조의 생명력이다. 산조는 지역적인 표현법이 두드러진다. 앞으로 산조연주는 이러한 지역성 회복에 큰 목표를 둘 필요가 있다. 여기에 더해서 산조가 어떻게 소통되었는지에 관한 장소성에 관한 접근도 이제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다.

20세기 산조의 생명력은 지역성이었다. 산조는 매우 유사해 보이고, 채보된 악보로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소리로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같은 국어책을 읽을 때, 지금도 지역마다 발음과 억양에서의 다름이 존재한다. 산조도 그러하다. 연주자의 출신 지역은 산조 연주의 DNA로서 강하게 존재하고 있다. 무릇 산조를 잘 연주하려면 이걸 간파하는 게 필요하다. 정소희의 대금을 인정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며, 앞으로 정소희를 비롯 다른 연주가들이 이에 대해서 더욱 파고들어야 한다. 산조의 생명력은 지역성에서 출발한다. 그랬던 것이 어떤 장소에 의해서 연주되고 소통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다시한번 강조하건대, ‘지역성’과 함께 또한 중요한 요소가 ‘장소성’이다. 앞의 4인의 대금산조는 소통되는 공간이 다르다. 

 

  같은 산조라도 어떤 장소에서 어떤 의미로 연주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까지를 묘파(描破)하는 연주자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소희 렉처 콘서트 시리즈가 계속되길

<소리의 기억, 산조의 생명력>은 매우 독특한 공연이었다. 유의미한 도전임에는 틀림없다. 연주자 개인의 성취라거나, 국악계로서 산조공연에서의 성과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함에도 나는 앞으로 이런 공연을 권장하진 못하겠다.

<소리의 기억, 산조의 생명력>은 무모한 도전은 아니었으나, 무리한 도전임은 연주자 자신도 스스로 깨달았을지 모른다. 한 자리에서 전혀 성격도 다른 네 개의 유파를 연주한다는 것은, 연주자의 연주측면에서나 관객의 수용적 측면에서 무리가 따르는 것은 분명하다. 아무리 훌륭한 판소리 명창이라도 한 자리에서 네 개의 유파의 눈대목을 부르는 건 어렵지 않을까.

 

이번에 소개한 네 개의 유파가 앞으로 렉처콘서트를 통해서 더 심화하길 바란다. 2022년 8월 6월, 서울돈화문국악당의 렉처시리즈를 통해서 정소희는 강연과 연주를 동시에 만족시켰다. ‘ 대금연주가 시리즈 1 한주환’을 지켜본 공연기획자 정지은 (아트스퀘어 위아 대표)은 “최근에 들었던 렉처 중에서 가장 재밌는” 자리였다고 기록했다. 

대금연주가 정소희가 앞으로도 계속 연주와 함께 그간의 연구성과를 병행하는 렉처콘서트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이를 정소희만큼 잘 해낼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

 

정소희_대금 연주자

윤중강 음악평론가 themove99@daum.net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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