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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윤중강] 산조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_산조대전

기사승인 2025.03.20  21: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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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산조대전> 첫날에 만난 세 주자와 세 고수

김은수_한갑득류 거문고산조

 

  스승이나 자신보다도, 유파 본연의 매력에 집중하라!                        

 

 

서울돈화문국악당의 <산조대전>은 올해로 5년차. 그간의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전통공연 최고의 브랜드’로 자리했다. 올해는 이태백 예술감독을 중심으로 3월 30일까지 계속된다.

2025년 3월 13일, 첫날부터 열기는 뜨거웠다. 첫날엔 세 명의 연주자가 무대에 올랐다. 김은수는 한갑득류 거문고산조, 유희정은 함동정월류 가야금산조, 김경아는 박범훈류 피리산조를 연주했다.

세 연주가에게 모두 적용할 수 있는 단어는 진정성이다. 산조를 대하는 진지함으로 출발해서 그간 산조를 잘 연주하기 위해서 얼마나 공(功)들였는가를 알 수 있었다. 산조만큼 연주 스타일에 대해서 호/불호가 갈리는 장르도 드물다. 누군가는 이들 연주자 각각의 스타일을 크게 선호하지 않을 수 있겠으나, 세 연주자의 열정에는 누구든지 탄복할 것이다.

유희정_

나무를 보는 연주 vs. 숲을 보는 연주

산조를 들으면, 연주자가 둘로 나뉜다. 몇 개의 기준으로 연주자를 이분할 수 있다. 첫 번째 기준은 ‘나무를 보는 연주’와 ‘숲을 보는 연주’이다. 김은수와 유희정은 전자였고, 김경아는 후자였다. 어느 쪽이 더 좋은 건 아니다. 다만 어느 한쪽의 성향이 크게 보이더라도,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안목은 커져야 한다. 두 번째 기준은 연주를 통해 확인하는 존재감이다. 연주자마다 자아를 드러내는 정도가 다르다. 흔히 산조만큼 연주자의 개성이 잘 알 수 있는 것도 드물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산조를 통해 알게 되는 연주자의 모습을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건 아니다.

 

김경아

스승이 너무 많은 연주 vs. 내가 너무 많은 연주

산조는 궁극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게 본질적인 숙명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많이 드러낼수록 좋은 산조 연주일까. 그렇지 않다. 유파(流派)를 뜻하는 류(流)의 이름으로 산조는 전승되었고, 또 전승되고 있다. 산조에는 유파(流派)가 중요하며, 또 그 000류를 누구에게서 배웠느냐 하는 사사를 중시한다.

산조는 궁극적으로 다음 셋의 결합 혹은 조화를 통해서 이뤄진다. 본래의 산조, 둘은 사사한 스승, 셋은 연주자의 개성이다. 같은 산조임에도 ‘달라도 너무 다른’ 이유는 이 셋의 결합의 정도가 다 다르기에 그렇다. 셋의 결합방식에 어떤 정답은 없다. 저마다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러함에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산조를 연주할 때 자신을 ‘적절하고 정확하게’ 드러내야 한다.” 이번 3인의 연주는 각각 우수하건 분명하다. 반면 산조라는 음악적 구조 속에 자신을 ‘적절하게 정확하게’ 이입(移入)했다고는 하긴 어렵다. 3인의 연주에 관한 평자(評者)로서의 내 판단은 이렇다. 김은수와 유희정은 ‘내 속에 스승이’ 너무 많고, 김경아는 ‘내 속에 내가’ 너무 많다.

 

 

산조, 내면적 사유와 연주적 기교의 이상적 결합

산조를 잘 연주한다는 건 무엇일까. 존재하는 유파[流]와 표현하는 자신[我]과의 적절한 균형감이다. 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잘 유지해야 한다. 그런 산조는 듣기에도 좋고, 가치도 높아진다.

이와 같은 균형감을 유지하기 위해선, 늘 자기를 점검이 필수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게, 산조의 필연적인 요소로서의 ‘류(流)’라는 가치다. 자신이 연주하는 산조(流)가 이미 존재하는 산조(流)와 얼마만큼 같고 또 다른지에 대해 수시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산조는 자기적 성찰의 결과물이다. 여기서 성찰이란 ‘연주적 기교’에 한정되는 게 아니다. ‘내면적 사유’와 연관된다. ‘내면적 사유와 연주적 기교의 이상적 결합’이 이상적인 산조의 궁극적 모습이다. 이번 세 사람의 연주를 통해서도 이와 관련해서 성취된 것이 꽤 확인되었지만, 아쉬운 점도 더 많이 보였다.

 

김은수

김은수 : ‘타현(打絃)의 정확성’과 ‘대점(大點)의 허전함’ 사이

김은수는 한갑득류 거문고산조를 탔다. 존재하는 유파에 관한 이해의 정도는 높아 보였다. 그러나 이런 산조를 자신이 중심이 되어 적절히 균형감으로 연주했다곤 말하긴 곤란하다. 본래의 산조의 정서는 존재했지만, 사사한 스승에 비해서 본인의 개성이 덜 드러났다.

김은수

김은수의 연주에는 김은수가 많지 않았다. 김은수의 연주에는 스승이 많이 보였다. 자신이 수학한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한 모습으로 비쳤다. 그게 김은수 자신이 지향하는 김은수 스타일이라 한다면, 평자로선 달리 말할 방도는 없겠다. 이건 어쩌면 현 단계로서는 좋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장기적인 시각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산조를 보고 들으면서, 나의 기쁨의 하나는 바로 이럴 때다. “저길 저렇게 타네” “저길 저렇게 할 수도 있구나!” 존재감에 가중치가 높아지는 순간이다. 김은수의 연주에선 그런 생각이 별반 들지 않았다.

김은수가 ‘나무를 보는 연주’에 치중하게 된 것도 스승의 가르침에 충실한 태도와 밀접하다. 김은수는 ‘숲을 보는 연주’가 충분히 가능한 연주가이다. 지금까지의 김은수의 음악적 행보를 보면,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예술적 주체로서의 자아가 확연히 드러날 수 있는 요건을 충분히 갖췄다. 동인 활동(수다)의 경험, 창작악단의 경험, 무엇보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삶의 태도를 주목하게 된다. 이제 명실상부하게 중견 연주자가 되어야 하는 시점에서 김은수의 취사선택(取捨選擇)은 매우 중요하다.

산조를 잘 연주하기 위한 기교와 기술은 산조의 필요조건일 순 있지만, 그것 자체가 산조의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산조대전을 통해서 김은수가 진지한 연주가, 성실한 연주가, 스승의 가르침에 충실한 연주자, 정교한 기교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연주가로서의 면모를 새삼 재확인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김은수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산조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내 스승의 연주는 ‘그 유파의 한 유형’

이제부터 하는 얘기는 꼭 김은수에게 국한된 얘긴 아니다. 김은수를 통해서 같은 세대 연주자에게 전하고 싶은 얘기다. 1970년대 중반부터 국악을 접한 내가 가장 고마워할 일은 당시 산조의 명인들이 생존하고 계셨다는 점이다. 무형유산(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명인의 연주를 모두 현장에서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국가에서 지정한 이른바 ‘인간문화재’는 아니었지만, 그들 이상의 실력을 갖춘 명인의 연주도 들을 수 있었다. 1930년대의 SP 음반부터 1970년대 LP 음반까지, 당시 보편적으로 들을 수 있는 음반을 거의 다 들을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이런 경험치의 나로선 확연하게 할 수 있는 얘기가 있다. 지금의 명인급의 연주도 매우 훌륭하지만, ‘000류’라 불리는 산조의 000의 연주와 지금 명인의 연주가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건 사람이 다르고, 시간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현상일 것이다.

문제는 무엇일까. 현재 000류를 연주하고 있는 000의 제자, 혹은 ‘제자의 제자’의 연주를 000도 그렇게 연주했을 거라는 후세대의 믿음 혹은 착각이다. 000의 연주와 000의 제자 또는 ‘제자의 제자’의 연주 사이에는 확연하게 간극(間隙)이 있다.

 

 

 21세기의 산조 연주자는 ‘내 스승의 연주가 곧 그 유파’라는 

사고에 서 벗어나야 한다.

 

 유파에 대한 충실도와 스승에 대한 충실도는 아주 다른 차원이다. 내 스승의 연주는 그 유파가 아니라, ‘그 유파(流派) 중 하나의 유형(類型)’이란 인식이 절실하다. ‘스승=유파’가 아니라 ‘스승=유형’이라는 인식적 기반이 공고해질 때, ‘내가 만나지 못했던 과거의 명인’와 ‘나에게 000류를 알려준 스승’의 양자(兩者) 사이에서 ‘내 산조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과 음악적 향방이 분명해질 수 있다.

 

거문고 받침대와 연주가의 자세

김은수는 거문고 받침대를 사용하며 연주했다. 받침대를 사용한 경우를 보긴 했으나, 이렇게 거문고 연주자의 상체가 앞으로 쏠린 적이 있었을까 싶었다. 시각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의문을 품게 된다.

김은수의 연주를 지켜보면서, 1970년대 두 명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쾌동(1910~1977)은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연주했다. 명인의 자세만으로도 경외심 같은 것이 생겨났다. 한갑득(韓甲得, 1919~1987)은 구부정한 느낌이었지만, 그건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쩔 수 없는 자세로 여겨졌다. 그 모습 또한 연륜에서 오는 감동이 있었다. 거문고산조를 연주할 때 어떤 정해진 연주 자세는 없다. 하지만 소리를 잘 만들어낼 수 있는 자세가 있고, 관객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기에 청중과 상호 소통하기에 적절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김은수가 이에 대해서 좀 더 연구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너무도 앞으로 쏠리는 경향이 강했다. 상체를 너무도 거문고 방향에 두니 연주자의 시선 등이 관객과는 자연스럽게 거리감이 생겼다. 이럴 경우는 어쩔 수 없이 관객과의 공감의 폭이 좁혀질 수밖에 없다. 산조는 공감이요, 교감이다. 국악은 듣는 이(귀명창)와의 소통이 중요하다. 이런 생각이 강한 나와 같은 사람에겐, 김은수의 자세를 좋게 보긴 어려웠다.

이런 자세이기에 실제 연주에서도 아쉬움은 드러났다. 거문고의 대점(大點)이 대점이 되질 못했다. 모습에서도 그랬고, 소리에서도 그랬다. 대점은 ‘술대를 비교적 높이 들고 위에서 아래로 세게 내리쳐서 만드는 소리’다. 크고 힘찬 소리를 내야 하고, 청중은 거기서 시원함과 장쾌함을 느낀다. 거문고 특유의 본질적 매력이다. 시각적으로는 몸을 이렇게 앞으로 기울이면 보다 악기에 집중하면서 에너지가 실리는 것과 같게 생각이 들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연주자의 생각과 실제 소리의 결과는 꽤 달랐다.

김은수(거문고)

손보다 소리

김은수의 ‘나무를 보는’ 연주는 장점과 한계가 너무도 분명히 드러났다. 좋게 말하면 부분적인 농현(弄絃)이 좋은 것도 많았지만, 그게 전체적인 음악적인 색깔을 만드는 것에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기 힘들다. 피아노로 비교한다면 하농(Hanon)을 매우 성실히 습득한 주자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런 장점이 드러나서 좋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연주 부분에서조차 이런 것들이 김은수의 개성이 보이기보다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르는 모범생 이미지로 비춰졌다.

 

김은수가 연주하는 악기는 거문고다. 거문고만큼 소리가 단절되는 악기도 드물다. 거문고는 주법상으로도 소리가 각각 끊어지는 느낌이며, 실제 우리가 느끼는 심리적인 여운(餘韻)은 실지라도 실제 물리적으로 들리는 거문고는 매우 단속(斷續)적이다. 현재의 김은수가 가장 매진해야 할 건 아티큘레이션 (Articulation)이다. 거문고 수법의 정교함을 넘어선 ‘가락의 연결’이 더 중요하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수법이 정확했다는 건 연주자 자신의 만족도나 이를 전수한 스승의 만족도는 높을지라도, 실제 관객은 그렇지 않다. 특히 산조의 청중 혹은 한국의 청중은 멜로디 중심으로 음악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김은수가 산조에서 프레이즈를 더욱 잘 살려낸다면, 그의 산조를 많은 이들이 더욱 좋아하게 될 거다.

 

유희정(가야금)_최재영(고수)

유희정 : ‘함동정월 가락’과 ‘1980년대 스타일’ 사이

현재 공연장에서 만나는 가야금산조를 ‘민속악 스타일’과 ‘국악과 스타일’로 확연하게 구분하긴 쉽지 않다. 1970년대엔 달랐다. 대학교 국악과 (서울대, 한양대, 이화여대, 추계예대)의 연주 스타일과 민속악계에서 성장한 연주자의 스타일은 매우 달랐다. 오른손도 그렇고 왼손도 그렇다. 어느 것만이 좋다고 얘기하긴 어렵다. 산조라는 민속악의 뿌리를 이은 민속악인 연주가 더 정통성에 가까울지는 모르나, 대학 출신의 산조에서도 또 다른 음악적 가치와 연주적인 특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종문화회관이 개관(1978년) 후, 대학 출신은 주로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개관 당시는 소강당, 이후에 소극장으로 명칭 변경)에서 독주회를 했다. 유희정의 연주를 보고 들으면서, 당시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했던 가야금주자의 여러 모습이 오버랩(overlap)되었다. 이건 유희정의 가야금연주 스타일은 긍정적인 접근이다. 이번 유희정의 산조는 ‘대학 출신 가야금 연주자가 1970년대부터 지향했던 산조 스타일의 완성체’였다. 지난 50년간 대학 국악과 출신 가야금연주가 어떻게 변화, 발전해 왔는지에 대한 하나의 성공 사례로서 그의 연주법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민속악인은 ‘흐름과 성음’ vs. 대학출신은 ‘음색과 농현’

1970년대 초반, 함동정월이 타는 가야금산조가 알려졌다. 이번 유희정의 연주는 ‘함동정월류 가야금산조’의 특성도 잘 살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그 시대의 가야금연주 스타일이 이어지고 있었다. 왼손과 오른손이 모두 그러했다. 특히 왼손의 전성(轉聲, 줄의 탄력을 이용해서 빠르고 깊게 줄을 누르는 수법) 등이 그러했다. 왼손의 기본적인 뜯는 방법을 비롯해 싸랭(옥타브 관계에 있는 두음을 거의 동시에 연결하는 수법) 등에서도 그런 특성이 잘 살아있었다.

 

당시 민속악의 입장에선, 대학 출신의 가야금연주에서 강조하면서 드러나는 특성이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 강조하는’ 경우도 인식되기도 했고, ‘흐름과 성음을 중시해야 할 산조’에서 ‘음색(音色)과 농현(弄絃)에 대한 괜한 집착’으로 치부되기도 한 것이다.

이렇듯 ‘민속악인이 중시하는 산조 스타일’와 ‘대학 전공자가 지향하는 산조 스타일’이 달랐다. 당시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들었던 국악과 출신의 산조에선 때론 어색함 같은 게 느껴졌지만, 유희정의 연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이런 스타일에 익숙해서 그런 건 아니다.

 

돌이켜보면 산조연주의 대학 스타일도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1960년대를 거쳐서, 1970년대 초반부터 이런 스타일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종문화회관 개관 이후, 거기서 열렸던 많은 가야금독주회를 직관했던 나로선 유희정의 산조연주는 ‘2025년에 완성을 본 1980년대 대학산조 스타일’이라 하겠다. 말을 바꾸면, 이 시기에 가야금산조를 연주했던 분이라면, 유희정의 연주를 통한 연주적 만족도가 매우 높을 거란 생각에 미친다.

 

유희정이 명인의 반열에 들기를 바란다

유희정은 대학부터 지금까지 여러 스승을 거쳤을 거라 짐작된다. 반면 이번에 연주한 함동정월류 산조는 거의 윤미용을 스승으로 삼아서 갈고 다듬었음이 확연히 느껴졌다. 이런 방식으로 수련했기에, 유희정의 연주에서도 숲이 보이기보다는 나무가 보였다. 부분의 농현에 대한 공들임 혹은 집착이 느껴졌다. 어떤 경우에는 함동정월류 특유의 무게감을 지속하다가 (흔히 민속악인의 연주에서 발견하기 힘든) 산뜻하고 가벼운 음 처리를 한다거나, 또 반대로 부드럽게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 어떤 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오른손을 크게 낸다거나 왼손의 농현을 매우 깊게 하는 등. 스승과 제자가 함께 음악적으로 세련된 진행을 만들고자 힘을 기울였던 결과가 분명히 귀에 쏙 들어와서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유희정이 가야금산조의 수법적인 측면에서 어떤 하나의 흐름을 깊게 파고들면서 지난 세월 연주의 장점을 하나의 집합체로 완성했다는 걸 높이 평가한다. 또한 그에게도 앞의 김은수와 비슷한 질문을 하게 된다. “이러한 연주적 정교함을 기반으로 해서, 유희정 자신이 지향하는 산조의 세계는 무엇인가?” 수법이 단지 수법으로서의 특징에 머무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유희정은 정교히 다듬어진 수법을 기반으로 “‘산조의 유파’와 ‘자아의 세계’의 밀접한 결속”을 화두로 삼아야겠다. 유희정이 명인의 반열(班列)에 들어서는 첫걸음은 여기서 시작되지 않을까.

 

김경아(피리)_김태영(고수)

김경아 : ‘이럴 수 있다’와 ‘이래야 하나’의 사이

20세기 피리의 역사를 남녀의 이분법을 적용할 때, 매우 유감스럽게도 여성 연주가의 역할을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건 여성연주가의 탓은 아니다. ‘피리는...’ 혹은 ‘피리만큼은...’ 나는 사석에서 이런 말을 가끔씩 들었다. 가야금과 거문고 등 현악기에는 여성연주가들의 활약이 컸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관악기는 그렇지 못했다. 1980년대부터 국악계에 여성연주가의 활약이 점차 늘어났지만, 국악계 혹은 남성주자는 ‘피리는 여성이 하기에 적합한 악기가 아니다’라는 그릇된 편견적 심리가 여전히 존재했다.

 

이런 풍토에서도 몇몇 여성 주자는 꾸준히 피리에 도전했고, 일정한 성과를 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활동이 국악계에서 부각이 되지 못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국악계에서 여성 피리주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만큼 폐쇄적이고 편견적이었다.

 

여성피리의 선두주자로서의 활약과 성과

‘여성피리’로서 국악계에 긍정적 통념(通念)을 만들어내면서 점진적 개혁(改革)의 기반을 마련한 연주가는 누구인가. 몇몇 연주가도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그 시점을 바라볼 때, 김경아가 가장 크게 부각(浮刻)된다. 실내악단 ‘슬기둥’을 발판 삼아서 피리와 태평소 연주가로서 입지를 굳혔고, 개인 독주회를 통해서 여성 피리연주가로서 자타공히 최고의 위치에 도달했다.

김경아는 여성피리의 선두주자로서 ‘피리의 여제(女帝)’ 혹은 ‘피리의 여사제’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왕권이라거나 종교계에서도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악계도 오랫동안 그러했는데, 김경아는 이를 극복하면서 성별의 구분과 무관하게 피리연주가로서 이룩해 낸 게 많았다. 이런 김경아로 인해서 그 이후의 여성 피리연주가는 남녀 이분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동등한 입장에서 피리연주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류(流) : 채보된 멜로디만 류(流)가 아니다. 고유한 연주법이 더 중요하다

김경아의 ‘박범훈류 피리산조’를 들으면서, 객석의 나는 세 단계로 감상하는 자세가 바뀌었다.

처음에는 “아 저길 저렇게 하고 있구나” 매우 신선한 기분 좋음을 경험했다. 음악이 진행되면서도 김경아 특유의 한배(속도감)와 해석을 응원하고 싶은 태도를 유지하려 했다. “아 저길 저렇게도 할 수 있겠지”라면서, ‘박범훈’보다는 ‘김경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태도로 이동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산조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서 ‘김경아 스타일’을 알게 되었을 땐, 안타깝게도 내 솔직한 마음이 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 저길 또 저렇게 하고 있구나!”

김경아의 연주를 들으면서 연주가 훌륭하다는 말은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산조가 훌륭하다는 말은 주저하게 된다. 연주자로서 공력에 탄복하지만, 그게 산조로서의 공력과의 연결되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런 스타일은 김경아의 ’연주적 측면‘의 찬란한 성과일 순 있어도, 만약 이를 ‘교육적 측면’에 적용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게 내 입장이다.

 

산조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박범훈류‘와 ’김경아 연주‘는 분명 일정의 간극이 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란 말이 있다. 이를 똑같이 산조에 적용해야 한다. “산조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김경아의 연주는 과거보다는 현재가 우위(優位)이며, 과거의 얘기(유파의 원형적 모습)가 거기엔 많지 않다.

 

문학에 비유해보자. 번역(飜譯, translate)은 어떤 언어로 쓰인 글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이다. 산조도 마찬가지다. 어떤 산조의 유파를 만들어낸 000류는 ’000의 언어로 쓰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산조를 연주한다는 건, 비유컨대 ’000가 쓴 음악을 자신의 음악으로 옮기는 과정이다. 박범훈류 피리산조를 김경아가 연주한다는 건, 박범훈이 원어 또는 출발어(source language)가 되고, 김경아가 번역어 또는 도착어(target language)가 되는 셈이다. 김경아의 경우는 어떠했나? 도착어는 창대했으나, 출발어는 그렇지 못했다. 번역으로 친다면, 김경아는 직역(literal translation)은 많지 않고, 의역(意譯, free translation)이 지나쳤다.

 

의역을 특히 많이 하는 경우는 이런 두 가지다. 원문 자체가 문학적으로 부족할 경우, 독자가 원문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 선호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박범훈류 피리산조’와 ‘산조대전’은 이를 적용할 수 없다. 박범훈류 피리산조는 작곡적인 측면이나 연주적인 측면이 함께 부합하는 산조다. 산조대전의 청중은 누구보다도 산조 자체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높다. 특히 올해의 이태백 감독은 유파의 측면이나 연주의 측면에서 ‘가장 산조다운 산조’를 들려주고자 함을 중시하고 있다는 게 두드러지게 보인다.

 

김경아 피리에 내재한 두 가지 특성 : 여성보컬 & 더블리드

김경아란 피리연주자에게는 산조뿐만 아니라 연주적 측면에서 두 가지 두드러진 특성이 있다. 하나는 ‘노래’다. 그는 악기연주를 노래로 동일시하는 경향이 보인다. 피리의 고유한 연주법도 잘 살려내지만, 그것보다는 노래하듯 연주한다. 여기서 노래란 무엇인가. 그의 피리에서의 표현법을 보면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여성 보컬의 가창방식이 오버랩된다. 소리를 끌어올린다거나 그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몸의 움직임에서 그런 현상이 발견된다. 대중음악계에서 성공한 가수 또는 재즈 계열의 가수와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

또 하나는 ‘더블리드’ 악기의 특성이다. 김경아의 여러 연주를 들을 때면, 김경아가 더블리드의 악기를 많이 연구했다는 걸 짐작하게 된다. 때론 색소폰 계열의 악기를 피리로 연주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소프라노 색소폰이나 앨토 색소폰 연주자가 입놀림과 몸놀림과 연결된다.

김경아가 학구적인 자세로 더블리드 악기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연구하고 피리연주에 반영하는 자세 자체는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이것을 산조와 연결하는 것은 또 다른 별개다. 이런 연주스타일이 ‘김경아 개인’에게는 매우 매력적이지만, 과연 이런 스타일이 타인에게 적용될 때는 어떠할까. 기대보다는 우려가 크다. 이런 스타일은 ‘교육에 의한 전승’될 영역은 아니다.

김경아가 연주를 앞에서 번역에 비유했지만, 김경아의 연주의 어떤 부분은 번역이라기보다는 실제 번안에 가깝다고 해야 마땅하다. 박범훈류 피리산조 특유의 고유한 정체성을 생각할 때 그러하다. 이번 연주를 계기로 해서, ‘음악적 사고와 연주적 역량이 뛰어난 김경아’가 ‘화려한 번역과 위험한 번안’ 사이에 존재하는 자신의 연주를 정확히 성찰하고서, 앞으로 이 유파 본연의 모습에 더욱 깊게 파고들게 되길 바란다.

 

합(合)의 미학 : 주자(奏者)와 고수(鼓手) 사이

주자(奏者)와 고수(鼓手) 사이에도 궁합(宮合)이 있다. 주자가 최상급, 고수도 최상급이라 해도 결과적 연주가 최상은 아니다. 산조대전 첫째날의 세 명의 고수는 세 명의 주자에게 모두 최상의 고수임이 틀림없었다. 세 명의 고수의 스타일은 매우 달랐다.

 

흥이 나는 김태영

김태영은 흥(興)이 나는 고수다. 젊은 고수임에도, 20세기 민속악을 경험한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흥취(興趣)가 느껴진다. 그가 장단은 잡으면 주자는 안심이다. 민속악의 느낌이 충만해 있기에,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나 할까. 고수의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인데, 이번에 김은수도 그랬다.

김은수와 같은 주자의 특징이 있다. 고수의 장단을 잘 들으며 연주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스스로 정교한 농현 만들기에 전념하기에 그렇다. 김태영의 장단은 ’연주자에게 맞춰서‘ 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연주자 스스로가 내면의 역량을 잘 끌어올리기에 집중한다. 말을 바꾸면 관객보다는 주자가 확실하게 우위에 있다.

 

감이 좋은 최재영

최재영은 감(感)이 좋은 고수다. 주자와 같은 걸 느끼고자 하는 마음이 절절히 전달된다. 김태영이나 최재영이나, 둘 다 연주자에게 맞춰있다손 치더라도,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 김태영이 장단을 알고 치는 고수라면, 최재영은 마음을 알고 치는 고수다. 김태영의 경우 고수가 때론 음악을 주도하려는 스타일이다. 어느 부분에서 신이 나면, 장구의 변죽이 아니라 복판이 신나게 치면서 음악적으로 리드한다.

 

이에 반해 최재영은 철저히 한발 뒤로 물러나 있다. 주자를 앞세우면서 주자의 모든 것을 면밀하게 살피면서 ’고수는 철저하게 주자를 바라지하는 게 본분‘임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런 자세가 산조를 매우 품격있게 만들어주면서, 즐겁게 긴장감을 계속 지속시켜준다. 최재영의 이런 태도는 참으로 믿음이 가는 스타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수를 내세우지 않는 최재영의 스타일을 보면서, 오히려 고수로서의 최재영을 궁금하게 만들어주었다.

 

흔히 주자와 고수의 연주가 잘 맞아떨어질 때 ‘합(合)이 좋다’고 칭찬한다. 유희정과 최재영이 딱 그랬다. 최재영의 감(感)의 저변에는 두 사람의 음악적으로 통하는 정(情)이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관객도 진지하면서도 정감있게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감정(感情)에 공감할 수 있었다.

 

맥을 짚는 원완철

원완철은 맥(脈)을 짚는 고수다. 정박을 짚는 위력(威力)이 전달한다. ‘고수(鼓手)의 고수(高手)’가 원완철이란 생각이 든다. 완완철은 ‘많이 치지 않아서’ 잘 치는 장단이다. 이건 원완철이 대금주자라는 것과 연관이 깊다. 주자의 선율이나 호흡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는 자세다. 말을 바꾸면 고수의 장단이 지나치게 크거나 많을 때, 연주자로서 곤혹스러움을 겪었기에 그러하다.

원완철은 듣기에 편한 음악이 가장 좋은 음악이란 생각이 있는 듯하다. 그는 장단의 기교를 내세우지 않지만, 장단의 한배(속도감)는 매우 정확하면서도 신축성(伸縮性)이 있다. 20세기의 산조음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원완철의 이런 태도에 매우 끌리게 된다. 산조의 주자에게 집중하고픈 관객이라면, 완완철의 장단을 제일 인정하지 않을까.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흥취의 김태영, 감정의 최재영, 맥박의 원완철으로 명명(命名)하게 된다. 김태영은 흥취의 메시지를 대범하게 확장(擴張)시키는 방식에서 앞서간다. 최재영은 감정의 이미지를 세련되게 절제(節制)시키는 능력이 돋보인다. 원완철은 맥박의 에너지를 균등하게 유지(維持)하는 저력을 갖추었다. 이들 세 사람의 뛰어난 특장(特長)이 고법의 길을 가는 후학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이수민 기자 Press@ithemove.com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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