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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오페라 무대로 보는 한국오페라 70년사 1

기사승인 2018.03.09  12: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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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태동기(1948)에서 국립오페라단 창단(1961) 이전까지의 무대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

이인선은 누구인가?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 , 1948년

올해 한국오페라 70년 기념의 해

올해는 한국오페라 7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는 헌정음악회가 ‘한국오페라70주년기념사업회(위원장 장수동)’ 주최로 3월 1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합창을 주요 레퍼토리로 구성된다. 장수동 총연출, 김덕기 지휘 외 3인의 연출이 함께 한다. 이에 앞서 기념사업회는 3월 9일과 10일에는 제주아트센터가 기획, 제작하는 오페라 <춘희 La Traviata> 전막 공연을 공동 기획해 지원한다. 한국 오페라는 1948년 1월 16일 이인선 선생에 의해 베르디의 오페라‘La Traviata <춘희>’를 시공관에서 공연한 것이 한국 최초의 오페라 무대다. 한국오페라70주년기념사업회는 이를 기념해 지난해 4월 17일 발족, 이후 심포지움, 기념음악회, 한국오페라70년사 출판, 이인선기념흉상건립, 기타 공연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 오페라 태동기의 무대들

<춘희> <마르타> <가면무도회> <파우스트><카르멘>

최초의 창작오페라 <춘향전>과 현제명

 

오페라라는 장르는 이탈리아에서 태동되어 400년이 넘는 역사를 갖는데, 우리나라에 오페라에가 시작된 건 이제 70년이다. 우리 오페라의 발단은 무엇일까. 그 배경을 살펴보면 서양음악이 국내 유입되기 시작한 시기는 19세기 말경, 기독교의 전래와 함께 찬송가가 보급된 것이 계기가 됐다. 20세기 초부터는 ‘창가’라는 명칭의 음악교육과 1920년대까지는 교회의 성극, 학교의 학예회의 형태로 한국 오페라 전사를 장식하며, 1930-40년대는 어린이들의 ‘동요극’이 등장 어린이오페라 형식으로 인기를 끌었고, 지금의 뮤지컬이라고 할 수 있는 ‘악극’이 등장해 한 시대를 풍미하며, 1940년대 초에는 ‘가극 운동’이 전개 됐다. 한국 오페라 최초의 무대가 되는 <춘희>는 1948년 1월 16일 이인선의 조선오페라협회 주최로 명동에 있던 시공관에서 5일간 10회 공연이 되어 완전 매진 되는 등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1945년 광복 이후 자유를 찾게 되자 음악인들도 활발하게 취향에 맞는 음악 활동을 하게 됐고, 그 때 세브란스 의전 출신으로 타고난 미성의 테너 이인선이 병원을 개업해 그 수익금을 바쳐 오페라 운동에 발벗고 나서게 되면서 시작됐다.

 

한국 오페라의 선구자 이인선 ( 테너, 기획자)

 

 

한국오페라의 선구자 이인선

테너 이인선은 해방 전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온 성악가로 정통 벨칸토 창법 오페라를 공부하고 돌아와 47년에는 한국벨칸토회 창립, 조선오페라협회 조직, 국제오페라사를 창단, 48년에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를 무대에 올렸다. 초연에 참가한 가수로 이인선, 김자경 등과 서울음대 전신인 예술대학 음악부 학생들이 합창단으로 출연했다. 추운 겨울 1월에 공연을 하게 되어 비올레타 역의 한명 이었던 마금희는 목에 이상이 생겨 3일째부터는 김자경이 원톱으로 소화했는데, 김자경은 추위 때문에 무척 고통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그만큼 당시 열악한 환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 같다. 당시 공연은 대성황으로 신문에 대서특필 호평이 났고, 관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인기 절정이었다고 전해진다. 오늘의 오페라 공연 상황과 비교해보게 된다. 이인선의 열정으로 4월 재연 무대도 성공을 거두자 일반인들의 오페라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분위기에 편승해 성악 연구 모임에 의해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가 준비되다 불발되기도 했다. 이어 이인선은 두 번 째 오페라 <카르멘>을 무대에 올렸고 임원식 지휘, 서울교향악단 반주, 카르멘에 김혜란, 김복희, 돈 호세역에 이인선, 송진혁 오현명 등이 출연했다. 해방 후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에도 이인선이라는 기획자가 있어 수준 높은 전막 오페라를 선보일 수 있었다. 1950년 2월 <카르멘>을 끝으로 이인선은 오페라 연구를 위해 미국으로 갔고, 그해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최초의 민간오페라단인 국제오페라사의 무대 공연을 끝을 맺었다. 한국 오페라의 선구자 이인선은 이후 병마로 미국에서 54세의 일기로 국립오페라가 창단되기 1년 전인 1960년 미국에서 타계했다.

 

 

첫 창작오페라 <춘향전> 탄생_청중에게 위로와 감동

<카르멘>의 성공 4개월 지나 한국 최초의 창작 오페라인 현제명 작곡 <춘향전>이 1950년 5월 일제 강점기 부민관(국립극장)무대에 올라 화제가 됐다. 현제명은 성악가로 음악 교육이 필요성을 절감하고 경성음악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취임해 이후 한국 음악계의 중심 인물을 많이 양성했다. 바쁜 와중에 춘향전을 대본으로 한 전 5막의 오페라를 완성해 6.25전쟁 발발 한달 전에 무대에 올렸다. 양악 위주의 선율에도 유행가처럼 번진 아리아 등이 인기를 얻었고, 우리의 창작 오페라가 국내 최초의 오페라 공연 2년 만에 탄생해 당시 많은 청중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었다는 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1951년 10월에는 김대현 작곡의 <콩쥐팥쥐>, 1954년에는 현제명의 두 번째 창작 오페라 <왕자호동>이 무대에 올랐다.

 

1948년부터 한국 전쟁이 끝나는 1953년까지를 한국 오페라의 태동기라 본다면, 이인선이 주도한 국제오페라사의 활동과 동인들에 의한 <파우스트>, 현제명이 주도한 최초의 창작 오페라 <춘향전> 등의 오페라가 이 시기에 공연되어 관객에게 박수를 받았다. 한국 첫 오페라 무대의 세 주역은 이인선, 김자경, 임원식(지휘) 이었다. 이 당시 지휘자로는 임워식(<라 트라비아타>), 김성태(<파우스트>), 김대현(<콩쥐팥쥐>)이 주요 인물이었고, 연출은 연극연출가 서항석을 비롯해 이화삼, 유치진, 이진순 등이 활약했다.

 

임효정 기자

 

 

* <기획_무대로 보는 한국오페라 70년사>는 태동기 부터 현재까지 올해 연간 시리즈로 연재된다. 

   다음호에  계속 ==>

 

 

임효정 기자 Press@ithemove.com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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