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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의 음악읽기] 현대음악의 ‘현대’를 생각한다

기사승인 2020.09.05  0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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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음악을 고민하는 연주가, 평론가, 작곡가, 애호가들이 

두루 소통하고 교차하는 지점이 필요하다.

                                    "

 

“테이트모던(런던 현대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볼거리는 관람객이 서로가 서로를 보는 것입니다.” 지난 해 방한했던 빅토리아 월시(英 왕립대학미술사, 큐레이팅학과 교수)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미술관의 목표는 관객이 교차하면서 사회적, 문화적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청중의 99프로가 기성작곡가와 작곡과 학생들로 채워지는 현대음악제에도 관객의 교차나 사회문화적 공간이란 개념 성립이 가능할까? 8월 19-21일에 열린 30주년 대구국제현대음악제(DCMF)를 둘러보면서 떠올렸던 질문이다.

“더 이상 현대라는 말을 쓰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번 음악제의 ‘30주년 특별 포럼’에서 작곡가 이건용이 한 말이다. 

이에 더하여 음악제의 초대감독을 맡았던 작곡가 진규영은 이제 대학을 중심으로 작곡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선언하며 탈(脫)아카데미즘을 제안했다. 

30년 전 대구국제현대음악제 출범 당시 ‘대구’, ‘국제’, ‘현대’, ‘음악제’ 가 의미하는 바를 다시 상기해보면 ‘탈현대’와 ‘탈아카데미즘’이 왜 필요한지 알 수 있다. 30년 전 대구는 이중의 변방이었다. 유럽의 변방인 서울, 그 서울에 대한 변방으로서의 대구. 중심- 주변의 위계적 관계를 벗어나 대구가 세계 중심으로부터의 끝단이 아닌, 또 하나의 중심이 되겠다는 시도는 다원주의와 탈중심성에 기반한 포스트모더니즘 정신과도 상통한다.

그동안 대구국제현대음악제는 펜데레츠키의 내한을 위시해서 국내외 작곡가들끼리 상호 소통하는 국제교류의 장으로서, 또한 예비 작곡가들에게는 교육의 장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해왔다. 지난 시기 프로그램에서 현대국악 및 ‘영화와 음악의 만남’ 등을 통해 동시대 음악제로 기능하기 위하여 유연성과 확장성을 추구한 시도도 있었음이 확인된다.

 문제는‘현대’와 ‘음악제’이다. 현대를 동시대(contemporary)로 해석하는 태도와 모더니즘의 현대(modern)로 해석하는 태도 사이에 수행적 양상은 다르게 나타난다. 컨템퍼러리는 ‘지금’이라는 시간적 현재성을 의미한다. 컨템퍼러리 음악에서는 21세기에 공존하는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다. 대중음악, 한국음악, 월드뮤직, 프리뮤직, 전자음악, 즉흥음악, 융합 예술등 기존의 관습이 경계지은 양식과 장르의 제한성을 자유롭게 넘어설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음악에서 ‘현대’는 ‘동시대’를 지칭하기 보다는 주로 스타일이나 사운드 측면에 한정되어 왔다. 20세기 무조성으로 상징되는 모더니즘 음악 이후 악음을 배제한 소음 위주의 음악이 지배적 음악이 되었다. 현대음악에 대한 사운드와 양식에 대한 암묵적 규범화가 고착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페스티벌에 모이는 관객 역시 이러한 코드에 익숙한 사람들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현대음악은 작곡가 그룹 외의 타자 그룹을 청중으로 창출하는데 실패하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아카데미도 아닌 축제라는 이름으로, 특정 태도의 생산자들끼리 자족하는 축제를 축제라 할 수 있을까. 모더니즘 양식을 함의하는 현대와 음악제(=festival)는 애초에 상호 양립이 불가능한 것 아닐까. 두 원로작곡가의 탈현대 및 탈아카데미즘 선언은 바로 이런 한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음악제의 초심을 회복하자는 좁은 의미를 넘어서서 밀교적 엘리트주의에 빠져 멸종의 길을 가는 현대음악 생태계 전반에 대한 자기 통찰과 반성으로 읽혀진다. 큐레이터도, 시장도 없는 작곡가들은 청중과의 접점을 통한 피드백보다는 현대음악계의 메인스트림의 요구에 탑다운(top-down)방식에 영향 받기 쉽다. 

실제로 지난 한 세기 동안, 예술 산업에 편입된 조성음악에 대하여 자율적 예술의 수호자로 자처했던 모더니즘의 저항은 이제 기법과 규범으로 변모하여 오히려 대학 말고는 비빌 곳이 없는 작곡가들에게 억압적 기제로 작용하여 왔다. 이럴수록 해방적 계기는 내 옆에서 악곡을 위촉하는 연주가나 내 음악을 들으러 표를 구입해서 오는 음악애호가들과의 실존적 접속에서 만들어진다.

 이제는 작곡가들끼리의 제한적 교류를 넘어서서 동시대음악을 고민하는 연주가, 평론가, 작곡가, 애호가들이 두루 소통하고 교차하는 지점이 필요하다. 지금보다 훨씬 더 상상적이고 창의적이면서 실용적인 음악하기가 현대음악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고 그 역할을 대구국제현대음악제가 해야 하지 않을까.“젊은 세대가 경계 없는 다양한 예술을 만나도록 이끌 의무”(빅토리아 월시)는 현대음악 종사자들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동시대 예술가들의 책무이자 소명이다.

 

이소영(음악평론가, 명지병원 예술치유센터장)

 

 

이소영 음악평론가. 명지병원 예술치유센터장 themove99@daum.net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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