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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종의 음악사에 숨은 인문학⓵] 베르디와 후배 예술가들의 갈등이 낳은 <아이다>

기사승인 2018.04.10  19: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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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

“요즘 젊은 녀석들은 버릇이 없다.” 어느 고대 유적의 돌 위에 써있는 문구라고 한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있을까. 1960년대 서구세계는 히피운동으로 들썩였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는 장발의 젊은이들은 통기타를 튕기며 견고히 짜여있는 문명을 조롱했고 자유를 예찬했다. 그러나 이미 그보다 100년 전에 머리를 헝클어뜨린 ‘자유족’이 서구에 있었다.

1860년대, 당시 신생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경제 문화 중심지였던 밀라노에서는 주말이면 젊은 시인과 작가, 음악가, 평론가들이 모여 난상토론을 벌였다. 와인 몇 병에 거나해진 그들의 목소리는 주로 ‘나이든’ 예술가들에 대한 성토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이들을 ‘스카필리아투라 밀라네제(Scapigliatura Milanese)’라고 불렀다. ‘밀라노의 머리 헝클어진 자들’이라는 뜻이었다. 머리가 헝클어진, 가진 것 없으되 자유혼과 격정에 찬 젊은이들. 100년 뒤의 ‘히피’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이들의 불만 또한 고루한 기성세대를 향한 것이었으니, 오늘날에도 새롭지 않은 주제였다. 이들의 눈에 당대 이탈리아 문학과 음악은 옛 수법만을 답습하고 있었으며 정신사적으로도, 기법적으로도 뒤떨어진 것으로 보였다.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은 ‘알프스 너머 북쪽’ 프랑스와 독일의 예술계였다. ‘선진적인’ 프랑스 독일 문학과 음악에서 영감을 얻어 이탈리아의 예술을 현대화하자는 것이 이들의 열망이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타겟’이 없었을 리가 없다. 이들이 불만을 토로한 대상은 당대 이탈리아 문화계의 큰 별로 여겨졌던 시인 알레산드로 만초니와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였다. 이 두 사람의 나이든 거인 때문에 이탈리아 예술의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이들의 행동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한 것은 1863년이었다. ‘스카필리아투라’의 주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작곡가 겸 지휘자 프랑코 파초가 오페라 ‘플랑드르의 망명자들’을 초연한 뒷풀이 자리에서 작곡가이자 시인이었던 아리고 보이토가 시를 낭독했다. “타락하고 우매한 늙은이들이 있다 … 이탈리아 예술의 신전은 매춘굴의 벽처럼 더럽혀졌다.” 이탈리아 예술의 신전을 유곽처럼 더럽힌 자들이라니, 누구일까. 바로 만초니와 베르디를 뜻한 것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베르디는 분노를 폭발시켰다. 이후 12년 동안이나 베르디는 보이토를 모르는 사람 취급했다. 그러나 베르디를 비롯한 선배 예술가들과 스카필리아투라 예술가들이 줄곧 등을 돌리고 지낼 수는 없었다. 베르디의 입장에서는 영향력 있는 후배 예술가들이 대부분 스카필리아투라와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 이들과 마냥 연을 끊고 지낼 수는 없었다. 반면 스카필리아투라 예술가들로서는 자신들이 구호와 이론만 무성했을 뿐, 작품으로 선배들을 능가할만한 업적이 없었으니 무턱대고 ‘노인네들’을 배격할 수도 없었다.

오페라 <아이다>
오페라 <아이다>

 

 

양쪽 사이 화해의 첫 단추는 1871년 베르디가 발표한 오페라 <아이다>였다. 대본을 쓴 사람은 베르디 모욕의 이벤트가 되었던 파초의 ‘플랑드르의 망명자들’ 대본을 쓴 안토니오 기슬란초니였다.

 기슬란초니는 스카필리아투라의 중심인물이라기보다는 ‘이들과 친해서 참여한’, 어느 정도는 방관자적 동인이기도 했다. 이어 1881년에는 24년 전 실패로 끝났던 베르디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 개정 초연이 이루어졌다. 이제 작곡가로서 보다는 지휘자로 능력을 널리 인정받게 된 프랑코 파초가 이 공연을 지휘했다.

 다시 6년 뒤, 1887년 베르디 <오텔로> 초연은 두 세력의 화해를 세상에 공표하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스스로 작곡가이기도 했던 아리고 보이토가 셰익스피어의 <오텔로>를 오페라 대본으로 각색한 뒤 “저는 역량이 모자라다”며 “베르디 선생님이 이 대본에 곡을 붙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보이토는 베르디를 겨냥해 “이탈리아 예술이 유곽의 벽처럼 더럽혀졌다”고 비난했던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가 20년이 더 지나 베르디의 위대성을 전심을 다해 표현한 것이다. 

두 세력의 화해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위대한 전통을 20세기까지 연장시키는 역할도 했다. 베르디의 노쇠를 걱정했던 스카필리아투라 출신 예술가들은 베르디의 전속 흥행사였던 줄리오 리코르디를 중심으로 ‘베르디의 후계자’를 찾아나섰고, 밀라노 음악원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자코모 푸치니를 점찍었다. 

자코모 푸치니

스카필리아투라 운동가들의 취향에 걸맞게 프랑스와 독일 오페라의 특징을 강하게 나타냈던 푸치니에 대해 베르디는 처음 탐탁지 않아 했지만, 결국 이탈리아 오페라계에 외국에서 온 새로운 바람이 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푸치니를 후계자로 ‘추인’했다. 베르디를 잇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위대한 거장은 그렇게 탄생했다.

오늘날 우리 문화계에는 세대간의 갈등이나 대립이 있는가. 거장들을 맹목적으로 떠받든 나머지 그들의 추문까지도 용인했다는 자괴감이 가득할 뿐이다. 세대간의 다른 관점은 피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위대한 산물을 낳을 수 있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세대전쟁이 잘 보여주고 있다.

 

 

유윤종 (음악칼럼니스트)

연세대 독어독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동아일보 음악전문기자와 독일특파원, 문화부장을 역임했으며 서울국제음악콩쿠르 사무국장 및 서울시향 월간SPO 편집장으로 재직 중이고 동아일보에 ‘유윤종의 쫄깃 클래식感’ 칼럼을 연재중이다. 신사동 음악공간 ‘무지크바움’에서 강의하고 있다.

 

THE MOVE Press@ithemo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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