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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비발디는 그렇게나 많은 협주곡을 썼을까?

기사승인 2018.06.13  16:5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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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종의 음악사에 숨은 인문학③

 

“비발디는 협주곡 한 곡을 썼고 그 곡을 500번 편곡했다.”

20세기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한 얘기라고 알려진 말이다. 스트라빈스키가 실제 이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말을 최소한 ‘먼저’ 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작곡가 루이지 달라피콜라이고, 숫자도 ‘600번’이었다고 한다. 누가 몇 회라고 했건, 더 중요한 것은 이 얘기가 유효한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이다. 과연 비발디는 작품마다의 차별성이 없는 협주곡을 계속 써나갔을까?

20세기의 창작자들이야 ‘남’과 다른 차별성에 창조의 의미와 동력을 두겠지만,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의 생전에 예술 소비자가 낯설어하는 예술적 문법(Syntax)을 시험하는 것은 생존의 근거를 거는 도박이었다. 자신의 작품들 속에서 차별성은커녕, 같은 시대를 공유한 창작자들까지도 섬세하게 유행과 취향을 맞추어가야 살아남던 시절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비발디의 협주곡들이 다 똑같이 들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섬세함’이 부족한 단언이다. 그의 협주곡들은 낱낱이 모두 강력한 개성과 회화적일 정도의 참신함을 갖추었고, 특히 독주악기의 색채와 연주법을 정밀하게 고려해 오늘날의 솔리스트들에게도 찬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하고자 하는 얘기는 비발디 협주곡의 참신성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왜 비발디는 그렇게나 많은 협주곡을 썼을까? 오늘날 우리는 이른바 ‘협연 장사’에 대한 유쾌하지 못한 얘기들을 알고 있다. 어쩌면 비발디도, 자격이 불완전한 독주자들을 협주곡 무대에 불러들임으로써 잇속을 챙겼던 것일까? 추적해보기로 하자.

안토니오 비발디는 1678년 ‘물의 도시’ 이자 전 세계에서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 지진이 베네치아를 습격했다. 공포에 질린 어머니는 “저와 뱃속의 아이를 살려만 주시면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아이는 살아났고, 부부는 약속대로 아이를 사제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이는 집에서 성당을 오가며 사제 교육을 받았다. 성당은 음악을 아는 사제가 필요했고, 아이의 아버지는 산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린 연주자였기 때문이다. 17세기 말의 베네치아는 아드리아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비잔틴 제국까지 영유했던 영화로운 15세기 베네치아가 아니었다. 1492년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 무역의 패권은 스페인이 빼앗아갔다. 오스만투르크가 강성해지면서 동방을 향한 항로도 차단되었다. 베네치아인들에게는 새로운 수입원이 필요했다. 때맞춰 등장한 것이 영국인들을 중심으로 한 ‘그랜드 투어’였다. 산업혁명과 식민지경영으로 부유해진 영국 상류층에게는 유럽 남쪽, 특히 따뜻하고 문화적 자산이 풍요로운 이탈리아를 보고 오는 것이 교양의 한 척도로 여겨졌다. 여행은 가족끼리도 왔지만 남자들만도 왔고 혼자서도 왔다. 예나 지금이나 여행지에 많은 것이 웃음을 파는 여인들이다. 새벽에 출근 발걸음을 서두르던 베네치아인들은 운하에 바구니가 둥둥 떠다니는 것을 자주 보게 되었다. 바구니에서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런 아이들은 ‘오스페달레’ 즉 구호소에 맡겨졌다. ‘오스페달레(선의)’또는 ‘피에타(자비)’라고 부르는 구호소는 르네상스 이래 병원과 양로원, 고아원 등의 사회복지 시설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베네치아에서는 위에 말한 이유로 고아원으로서의 기능이 주가 되었다. 남자 아이들은 커서 수병이나 상인이 되었고, 여자 아이들은 음악교육을 받았다. 이 아이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협주곡이나 교회음악을 연주했다. ‘피에타’ 소녀들의 음악회는 그 자체로도 수입원이 되었지만, 이 연주회 자체가 매력적인 볼거리로 소문이 퍼지면서 더 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았기에 베네치아 당국으로서는 일거양득이었다. 안토니오 비발디 ‘빨강머리’ 사제는 24세 때 사제서품을 받고 이 피에타의 음악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 소녀들을 생각해 보세요. 이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간직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베네치아에서 비발디의 생애를 연구하는 영국 음악학자 미키 화이트의 설명이다. “비발디는 이 아이들 각각을 위해 여러 악기를 위한 협주곡을 맞추어 썼고, 교회음악에서는 소프라노와 알토 솔로를 부각시켰습니다. 그럼으로써 버림받았던 여성음악가들은 하룻밤 콘서트에서만이라도 그날 저녁의 주인공이 되었고, 한껏 자존감을 높여 살아갈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를 비롯한 음악교육이 청소년들의 협동심과 사회화에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한편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비발디의 시대에 이미 음악과 무대가 전해주는 자존감은 어려운 세상을 헤쳐나갈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이다. 6월 15, 1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카운터테너 안드레아스 숄과 잉글리시 콘서트의 연주회가 열린다(한화클래식 2018). 고아 음악가들의 아버지였던 비발디를 비롯해 퍼셀, 헨델 등의 아름다운 바로크 레퍼토리를 맛볼 수 있는 기회다.

 

유윤종 (음악칼럼니스트)

 

 

THE MOVE Press@ithemove.com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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