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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다 hear

기사승인 2019.08.20  21:4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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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과 인간의 반응을 믿을만하게 묶어주는 것이 바로 ‘듣기’가 아닐는지....

1593년 런던. 로즈극장 무대 위에는 촉망받는 젊은 작가 셰익스피어가 새로운 공연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 연습을 시작하기 위해 분주하다. 하지만, 제작자 휴 페니맨은 젊은 작가를 무시하며 배우들에게 자신의 위력을 과시한다. 그 때, 극장을 떠났었던 배우들이 다시 돌아와 극장문을 열어젖히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우리가 돌아왔다!"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1998년에 제작되어 아카데미 7개 부문을 수상한 죠셉 파인즈와 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영화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창작과정과 <십이야>의 내용을 절묘하게 혼합하여 구성이나 미술, 특히 화려한 시대의상으로 많은 볼거리와 재미를 주었던 작품이다.

지금도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장과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종종 자료로 활용하는 이 작품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뜬금없게도 벤 에플렉이 극장문을 열고 들어오던 이 장면이었다. 걱정 말고 이제 작품을 내게 맡기라고 작가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며, 멋진 역이 있다면 뭐든 연기해 주겠노라 장담하는 배우. 그리고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대본을 읽어나갔다. 로즈극장에서도, 글로브 극장의 빈 무대 위에서도, 백주대낮에 울려 퍼졌을 배우의 목소리. 셰익스피어는 연극을 듣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여름 밤의 꿈>에서 테세우스가 "연극이란 아무리 잘해도 인생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 시시껄렁한 극이라도 상상으로 보충한다면 나쁘지 않다."고 할 정도였으니, 열린 공간에서 맘껏 상상하라는 뜻이었을까? 어찌 보면 그렇게 연극은 본디 보고 들으면서 동시에 상상하고, 그렇게 저마다 세상을 창조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곳에서 그들에게 시(詩)는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불빛 같은 것이었으니, 셰익스피어의 배우들에게 잘 들려주는 것은 또 얼마나 커다란 미션이었을까?

 

1997년 어느 날,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연기를 영어로 뭐라고 하지?" 대답했다. "acting" 그러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세상에 acting은 없어!"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말씀을 이었다. "다른 게 있지!" "..." "reacting!" 넌센스에 살짝 당한 느낌이었을까? 입꼬리는 올렸지만 눈은 따로 놀았다. 그리고 다음 말씀을 들었다. "세상에 저 혼자 스스로 작동하는 존재가 있을까? 없지. 있다면 그런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고 부르지. 나무도 꽃도 비도 바람도 하늘의 달이나 우리가 서 있는 땅마저도 서로 힘을 주고받으며 반응하는 것이고,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 우주만물은 반응을 통해 움직이는 거야. 그러니 연기가 곧 반응인 셈이지."

 

"봐!" "들어!" "말을 해!" "걸어!" 연기를 시작하는 대다수의 배우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지시들이다. 누구나 당연히 할 수 있는 것 같은 이런 행동들도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하나하나 새롭게 인식해야 하고 제대로 익혀야만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듣기’다. 듣기는 반응의 출발점이며, 때로는 세상의 배우를 두 종류로 나누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배우들이 긴장과 과시욕, 지나친 자의식으로 인해 종종 듣기에 실패한다. 실제 삶에서도 그렇다. 말이라는 것이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움직이기 위해 사용하는 거라면 응당 상대의 반응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우리는 많은 순간 자기 말에 빠져 상대의 말을 듣지 못한다.

 

셰익스피어의 대사에는 인물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비해 오늘날의 연극은 인물의 대사에 속마음이 거의 드러나 있지 않다. 감정도 감추고 많은 경우 속내도 드러내지 않아 배우들도 상대의 말을 듣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적극적 경청. 사실 듣기란 표면의 말뿐 아니라 그의 눈 뒤에 들어 있는 생각을 읽기 위해 온 감각을 열어 느끼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세상이 무대’요, ‘자연의 거울’이라면 어쩌면 무대 아래 세상에서도 서투른 우리 삶을 볼만하게 바꿔주는 것이 바로 상상이요, 상상의 불씨이자 인간과 인간의 반응을 믿을만하게 묶어주는 것이 바로 ‘듣기’가 아닐는지.

 

* 2019년 봄의 끝에 돌아가신, 안민수 선생님을 추모하며.

(원로 연극 연출가 안민수 동국대 명예교수가 지난 5월 23일, 오후 2시40분 향년 79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별세했다. 동랑레퍼토리극단 상임연출가를 거쳐 한국연극학회 회장과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장, 서울예술대학 학장·이사장을 지냈다. 연출한 작품은 <리어왕>, <태>, <소> 등이 있다.)

 

 

진남수 (배우, 극작가, 호원대 교수)

THE MOVE Press@ithemove.com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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