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컬 <홍도1589>
천하는 공물(공공의 것)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자격이 있다면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 -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이 굳건하게 떠받들어지던 조선에서 태어나 종묘사직 대신에 천하를 앞세우며, 국가 사회 전체가 왕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백성 모두의 것이라는 사상으로 혁명을 꿈꾸던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여립(1546~1589)이다.
과거에 급제한 이후, 줄곧 서인의 편에 서 있던 그가 집권 세력인 동인 쪽으로 노선을 바꾸자 서인들은 그를 미워하며 집중견제 하였고, 결국 동인 세력의 강력한 천거에도 불구하고, 그는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비록 낙향하였으나 그의 이름은 높았고, 영향력은 여전했다. 그는 진안 죽도마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다. 높고 낮음을 없애고 오고 가는 문턱을 치웠다. 그곳에서 함께 밭을 갈고 활을 쏘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자유로운 세상의 꿈을 꾸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자유로운 세상”이라니 이보다 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
그러나 그의 꿈은 부풀어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갔다. 그러던 1589년 10월, “정여립과 대동계가 한강물이 꽁꽁 언 때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거병하여 서울로 진격하기로 했다”는 고발이 조정에 접수되었다. 긴급체포령이 떨어지고 관군들이 밀어닥쳤다. 거센 피바람이 불어왔고 그는 죽도로 내려가 결국 자결했다. 그날 이후, 1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무려 3년 동안이나 처형이 진행되었다. 이 사건을 역사는 <기축옥사>라 부른다. 그리고 그 살육의 끝에 임진왜란이 났다.
왕은 달아났고 백성은 죽어갔다. 그러나 꿈꾸는 자들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평등 세상을 꿈꾸던 대동계는 기축옥사의 피바람에 날려 뿔뿔이 흩어졌으나 영영 사멸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꿈은 민주주의의 씨앗이 되어 이 땅에 뿌려졌고, 돌 틈의 민들레로 다시 피어올랐다. 그들은 동학년의 들풀님네로 일어섰고, 대한독립의 함성으로, 민주주의 불꽃으로 되살아났다.
<홍도1589>가 막을 올렸다.
뮤지컬 <홍도1589>는 제3회 혼불 문학상 수상작인 소설<홍도>를 무대화한 작품이다. 소설은 처음 ‘그 옛날 정여립의 곁에 있던 한 사람이 오늘날도 죽지 않고 살아서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다면’이라는 허무맹랑한 상상에서 쓰여졌다고 한다.
뮤지컬 <홍도1589> 역시 정여립의 외질손녀 홍도와 그녀가 사랑한 자치기라는 사내의 400년이 넘게 이어지는 사랑 이야기를 대동세상의 꿈 위에 그려놓았다. 역시 참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헌데 참 우습게도 무대를 보고 있자면 눈시울이 뜨겁다. 무대는 믿음의 공간이다. 약속의 공간이며, 기적의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꿈이 영글어 현실이 된다.
<뮤지컬 홍도1589>는 전북문화관광재단에서 제작하여 한옥마을 입구에 있는 전북예술회관에서 벌써 3년째 되살아나고 있다. 대다수의 지역 문화 콘텐츠가 단발성에 그치는데 비추어 보면 전북의 상설공연 <홍도1589>의 연이은 부활은 그 자체로 놀라움을 준다. 먼 옛날 혁명가 정여립이 외쳤던 그토록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이제 그의 땅에서 아름다운 현실이 되어 있다.
진남수
호원대 교수 · 극작가 · 배우
진남수 호원대 교수 / 극작가, 배우 namsuls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