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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수의 무빙액트] 달려라 천재야!

기사승인 2020.12.09  23:4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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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국립극단 <발가락 육상천재>

“자기가 천재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 봐!”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들어갔던 기초연기 수업 시간. 선생님의 첫 질문은 이랬다. 덧마루를 이어붙인 무대 위에 올라앉아 있던 서른 명 남짓의 동기들은 서로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며 겸연쩍은 코웃음을 짧게 내뱉고는 다시 선생님을 올려보았다. 아마 우리는 다음 말씀의 순서를 이렇게 예상했던 듯하다. “천재는 없어. 그러니 모두 열심히 노력 해야 한다!” “네!” 뭐 이런 식의 익숙하고 바람직한 전개. 그때였다. 한 녀석이 번쩍 손을 들었다. “오...” 여기저기에서 감탄과 조소가 섞인 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선생님께서는 빙긋이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올해 입학생 중에는 예술 할 사람이 한 명이 있군.” ‘왜요?’라는 무언의 항의를 담은 우리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선생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예술은 천재의 몫이니까.” 순간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도 같아서 스무 살 언저리의 나는 심사가 어수선해졌다. 다음 말씀은 대충 이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네들은 모두 천재다. 학력고사가 몇 점이었든 고교 시절에 몇 등이었든 자네들의 천재가 자네들을 충동질하여 예술 명문가의 일원이 되게 한 것이다.” 그날 우리는 각자의 천재를 품에 안고 나란하게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어쩌면 그 후로 우리의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각자의 천재를 증명하기 위한 달음박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천재께서... 푸하하하”

어림없는 풋내기 슈팅에 어설픈 기본기, 키가 좀 크고 점프력이 좋다는 것 외에는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고교 농구선수 강백호. 90년대,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는 입버릇처럼 허세를 달고 다녔다. “난 잘해! 난 천재야!” 독자들은 그의 허세를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실패에 기죽지 않기를 빌었다. “그래! 너 진짜 천재야! 지금은 좀 모자라도, 자꾸 틀려도, 넌 농구를 진짜 좋아하니까.” 만화는 농구를 정말 좋아하느냐고 물었고, 오랜 연재가 끝나가던 31권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비로소 답했다. “정말 좋아합니다.”그 시절 내내 그의 농구를 지켜보던 우리는 세상의 불안과 연이은 실수 속에서 서로 지치지 않기를 언젠가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내는 날이 오기만을 응원했다.

“한쪽 발로 땅을 민다는 느낌으로 앞으로 팍팍 나아가는 거야. 한 발씩 한 발씩.”

천재를 잊을만 했을 때, 천재가 제목에 들어간 연극이 나왔다. <발가락 육상천재> 김연주 작, 서충식 연출의 이 청소년 연극은 국립극단이 진행 중인 ‘12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의 경계에 서 있는 열두 살의 소년들을 조명하고 있다. 내용의 대략은 이러하다.

평온한 바닷가 마을에 자리한 자갈 초등학교 육상부에는 언제나 1등을 하는 ‘호준’, 2등만 하는 ‘상우’, 만년 꼴찌 ‘은수’가 있다. 그런데 이 학교에 새로 전학 온 정민이가 새로운 1등으로 부상하면서 육상부의 지각이 흔들린다. 1등 자리를 뺏긴 호준이는 ‘인어’가 자신의 제일 긴 발가락을 먹어버렸다는 핑계로 더는 달리지 않는다. 그 뒤로 이어지는 눈부신 허세와 치열한 깐족거림과 필사적인 억지들. 작가의 말을 빌자면 그것은 “뭐라도 잡기 위해 한 움큼 쥐어보는 12살의 꼼지락거림”이었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리가 계속해 온 생존을 위한 버둥거림이었다. 소년들은 허풍처럼 인어를 잡고, 인어에게 달리기를 가르치고, 시합을 하고, 여차여차하다가 인어에게 모두 발가락을 잡아먹히고 만다. 결국 인어의 배를 가르고 발가락을 다시 꺼내지만, 이번엔 제일 긴 발가락이 누구 거냐는 문제가 있다. 네 명의 아이들은 제일 긴 발가락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출발선에 선다. 그리고 다시 달린다.

 

뜨문뜨문 기억이 난다. 진실과 거짓, 허세와 불안, 자존심과 열등감이 뒤엉킨 채,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를 쓰고 몸을 부풀렸던 12살. 본래부터 어린시절을 돌아보면 지금의 내 모습이 있는 법인지, 그렇게 뒤돌아본 자리에는 바가지 머리를 하고 나를 보는 열두 살짜리 아이 하나가 짤막하게 움츠러든 내 천재적인 발가락을 툭툭 치며, 웃으며 괜찮다고 하고, 그냥 앞으로 팍팍 뛰면 되는 거라는 ‘천재의 생존법’을 얘기해 주면서, 손뼉을 치며 소리치며 내내 폴짝거리고 있었다.

 

진남수 (호원대 교수 · 극작가 ·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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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2011년 5월 2일 출범한 (재)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는 어린이청소년극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작품개발을 수행하고 있다. 청소년 관객층에 대한 연구와 리서치, 워크숍 등을 수행하고 이 과정에서 얻어지는 내용과 의미를 제작 공연에 반영해 청소년 연극의 새로운 방향성을제시할 수 있는 시스템과 제작 여건을 마련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는 청소년을 문화 주체로 인지하고 이들과의 적극적인 만남과 실질적인 소통의 통로를 지속적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청소년극의 연극적 의미와 사회적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다시’ 생각하고 있다. 청소년극을 만든다는 의미는 무엇인지, 왜 청소년극이어야 하는지, 어떤 청소년극 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은 탐색과 도전을 통해 새로운 청소년극의 지표가 되기 위해서다. 청소년극은 청소년과 세대를 넘어선 어떤 만남을 의미한다.

진남수 호원대 교수 / 극작가, 배우 namsulse@hanmail.net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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