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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은 번개같이! 사랑은 덧없고 삶은 계속된다

기사승인 2021.01.29  01:4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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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모페이 쿨랴빈의 연극 <오네긴>

 

가득찬 술잔을 비우지도 못한 채

인생의 축제를 일찌감치 떠나간 자

내가 지금 오네긴과 헤어지듯

인생의 소설을 다 읽기도 전에

돌연히 작별을 고할 수 있었던 자

행복하여라

- 알렉산드르 세르기예비치 뿌쉬낀 <오네긴> 中

 

 

눈 오는 겨울밤이면 전설이 부활하고 난롯가에 둘러앉은 이들은 긴 이야기에 휩싸인다. 러시아의 겨울이라면 어떨까. 러시아인들이 ‘자신들의 모든 것’이라 일컬으며 러시아 근대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세르기예비치 뿌쉬낀(1799-1837)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은 러시아 겨울의 상징처럼 겨울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다. 푹푹 쌓인 눈길을 헤치고 시골 저택을 향해 자작나무숲을 달리는 마차에 탄 젊은 귀족의 권태로운 독백으로 시작하는 첫 장면으로부터 격렬한 청춘의 시절과 고독한 인고의 세월을 지나 회한에 찬 냉소 가득한 마지막 대사까지, 쓸쓸하고 황량한 겨울의 풍경이다.

이 원작을 기반으로 다양한 해석과 버전의 작품이 오페라, 발레, 연극 등으로 나와 있다. 지난 해 12월 11일~12일, LG아트센터에서 네이버 중계로 티모페이 쿨랴빈 연출의 연극 <오네긴>을 2회 중계 했다. 

당초 11월 초에 내한공연하기로 예정됐던 러시아의 차세대 신예 거장 연출가 티모페이 쿨랴빈의 한국 첫 방문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온라인 영상으로 볼 수밖에 없어 아쉬움이 컸다. 그럼에도 영상으로 만난 연극무대는 차세대 신성 연출가답게 음악과 무용과 무브먼트가 곁들인 현대적 감각의 독특한 연출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시베리아 중남부에 위치한 노보시비르스크 국립극단 레드 토치 씨어터를 이끌고 있는 쿨랴빈의 <오네긴>은 무엇보다 오네긴이라는 인물에 주목해 일상의 권태로 지루해하는 러시아 상류층 지식인의 음울한 캐릭터를 부각한다. ‘닥터 지바고’를 연상케 하는 오네긴의 방안 커다란 창은 다양한 장치로 활용된다. 책상 아래 깔고 있는 표구한 머리통 달린 늑대 가죽 러그는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설경과 함께 은유적 메시지를 은근히 깔고 있는듯하다.

 

눈 덮인 겨울 풍경 속으로 사랑과 슬픔, 고통, 인간의 의지, 복수.... 그리고 그 후에 찾아오는 허무함 등이 묘하게 오버랩 된다. 사랑(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후의 절망과 고통은 지독한 고독을 불러온다. 쿨랴빈의 무대 속 오네긴의 권태와 고독은 방안의 홀로 있는 시간에 담겨 있다. 웅크리고 앉아 퀭한 눈을 하고 물끄러미 모니터를 바라보다 몽롱한 듯 와인을 마시고, 음악을 듣고.... 무료하고 나른한 시간이 흐른다. 영상을 통해 교환되는 오네긴과 타티아나의 사랑의 감정도 메마르고 불안하다. 

성에 낀 커다란 창에 얼어붙은 얼음처럼 전운이 감도는 푸른빛 무드에 절제된 회색빛 흑백 무대는 직접적인 암시로 묵직하고 실존적이다.

 

존 크랑코의 발레 <오네긴>이 화사한 노란빛으로 청순하고 순수한 시골처녀 타티아나의 봄날의 로맨틱한 정서를 부추긴다면, 쿨랴빈의 <오네긴>은 사랑의 불안을 냉소적으로 비춘다. 그래서 어쩌면 청춘의 열병과 같은 사랑의 회한과 덧없음이 봄날처럼 가볍게 스쳐가는 듯 서정적이었다면, 훨씬 더 차갑고 냉랭한 겨울의 모습이랄까.

그런가하면, 영화 <오네긴>에서 타티아나 와 오네긴의 사랑의 열병에 대해 묘사가 원작 소설에 충실한 실제적 러시아의 전원과 겨울의 모습을 반영한 반면, 쿨랴빈의 연극 <오네긴>은 간결한 상징과 모던함으로 현대성에 주력한다. 인물들의 움직임과 표정만으로 분위기를 압도한다.

 

 마지막 장면의 갑작스러운 변환은 놀라움을 넘어 충격적이다. 오네긴의 지루한 독백의 긴 나레이션과 권태로운 분위기에 젖어 있다가, 간간이 흐르는 음악과 춤에 흥얼거리다 갑자기 꽝! 마치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카프카의 망치처럼, 시간이, 정신이 번쩍!.... ... 음....하고 화들짝 놀라움에 소멸은 번개같이 온다.. 어둡고 묵직한 형체를 구성하고 있던 부분들이 깃털처럼 순식간에 쏜살같이 뜯기어 날아간다. 허무한 시간들이 흩날리는 종잇장처럼 가볍게 소멸한다.

 

임효정 기자 (공연칼럼니스트)

 

 

 

임효정 기자 Press@ithemove.com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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