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N제곱이 이룩해 낸 ‘해원’의 숭고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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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N제곱(김성근X오초롱)의 <해원해줄게요 : REMASTER> (2025. 01. 24~26.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
공연예술창작산실과 진정성
진정성이란 말을 많이 듣는다. 예술적인 진정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일까? 해마다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을 통해서 뛰어난 작품을 만난다. 그 작품에서 모두 진정성이 느껴지는 건 아니다. 무대에 출연하는 공연자의 ‘예술적인 기량의 우수함’을 통해서 창작산실의 의미가 살려진다. 어떤 공연은 전통을 중심에 두고서 ‘기술적인 시스템의 보강’으로 창작산실의 의미가 살려지기도 한다.
그것만으로도 ‘우수 신작’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지만, 그게 곧 진정성과 연관되는 건 아니다. 말을 달리하면, ‘우수 신작’이 모두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며,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도 않는다.
다시 보고 싶게 하는 작품은 어떤 작품일까? 진정성이다. 진정성이 충분조건이라고는 할 순 없지만, 진정성이 필요조건으로서의 가치를 지닐 때, 그 작품은 다시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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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을 담아낸 내용과 형식
첫째, 진정성은 우선 ‘내용’과 ‘형식’에서 그러해야 한다. 담아내고자 하는 의도가 진정성이 있다고 해서 그 공연의 진정성이 느껴지진 않는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하다. 공연 제목에도 있는 것처럼, '해원(解冤)'이 공연의 화두다. 해원은 ‘원통한 마음을 풂’을 내용으로 삼는다. 이 공연은 20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코로나로 인해 지친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공연이었는데, 지금 이 땅에도 여전히 해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현실이 매우 슬프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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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우리는 큰 참사를 겪었는데, 이 공연을 객석에서 지켜보면서 그 일을 생각하는 관객도 있었으리라고 본다. 해원(解冤)의 방식은 말을 달리하면 위무(慰撫)의 방식이다. 위무란 ‘위로하고 어루만져주면서 달려주는 것’이다. 해원을 내세운 이번 공연에서, 두 사람은 아쟁과 피리, 또 목소리를 통해서 ‘위무를 통한 해원’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 공연은 내용과 형식이 서로 상보(相補), 상생(相生)하면서 진정성을 담아낸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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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을 만족시킨 전통성과 동시대성
둘째, 진정성은 ‘전통성’과 ‘동시대성’을 모두 만족시킬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을 따져보면 전통이 아닌 게 없었다. 모두 전통 소리와 전통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동시대성과 연결이 될까? 다소 주관적인 판단일 수도 있겠으나, 공연을 오래 지켜본 사람은 무대의 연희자의 속내까지 꿰뚫게 된다. 전통을 학습한 사람에게서 전통성이 느껴지는 건 당연하지만, 그 전통을 익힌 체득의 단계가 높을 때, 또한 그것이 체화(體化)되어서 자신과 우리의 이야기가 되었을 때 ‘동시대성’이 느껴진다. 전통성을 전통성으로 드러내는 게 실력이라면, 전통성을 동시대성으로 승화시키는 건 공력이다. 실력이 쌓여서 공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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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N제곱,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2N제곱(김성근X오초롱)은 실력을 바탕으로 공력을 무대에서 드러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실력과 공력의 차이는 어떻게 구분할까. 이 또한 공연을 많이 본 사람의 경험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이 실력이라면,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 공력이다. 실력을 넘어선 공력은 연주가의 내면을 통해서 드러나는 경우가 더 많다.
공연을 보면서 관객은 일시적으로 현혹(眩惑)하게도 된다. 굿과 연관이 있는 공연일수록 그렇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전통에서 동시대성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게도 할 순 있다. 그러나 확실한 동시대성의 가치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위장으로서 결국 발각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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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을 다 갖춘 공연자의 모습은 어떠할까. 내면을 보이는 데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통성’과 ‘동시대성’을 동시에 구비하고 있는 무대 위 공연자의 특성, ‘흔들리지 않는 내면’이 읽힌다. 2N제곱은 무대에서 그들의 진정성있는 내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흔히 전통성과 동시대성은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훌륭한 공연을 보면 그렇지 않다. 이건 ‘하나 안에 존재하는, 가를 수 없는 둘’이 된다. <해원해줄게요 : REMASTER>가 딱 그랬다. 이 공연에서 내용과 형식이 일치했고, 전통성과 동시대성이 공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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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초롱, 대체불가의 예인
<해원해줄게요 : REMASTER>에서의 오초롱은 ‘해원’ 그 자체였다. 그만큼 존재감이 컸다. 남도소리 및 남도음악과 연관해서 김성근의 존재감도 컸지만, 평안도소리와 평안도음악과 연관해서 오초롱은 대체불가(代替不可)로 보였다. 피리에서도 그렇고, 소리에서도 그렇고, 퍼포먼스에서도 그렇고, 태평소에서도 그랬다.
“지금 저 자리에 오초롱이 아니면 누가 앉을 수 있겠는가?” 오초롱 외에는 도저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초롱은 피리연주자로서 든든하게 갖춘 게 있고, 또한 보컬리스트로서의 가능성도 있었다. 좋은 피리연주자가 많지만, 아무래도 특정 장르에 치우쳐있다. 종묘제례악, 영산회상, 피리산조를 모두 능숙하게 잘 부는 연주자는 실제 찾으면 많지 않다. 종묘제례악이나 영산회상을 잘 부는 피리연주자는 톤은 좋은데 기교에서 아쉬움이 발견된다. 피리산조를 잘 부르는 사람은 기교는 좋은데, 톤이 묵직하거나 진중하지 못하다.
오초롱은 아니었다. 범(汎) 장르의 전천후 피리주자였다. 또한 훌륭한 소리꾼이기도 했다. <주마>, <파랑(波浪)>에서 특히 오초롱이 돋보였다. 오초롱은 ‘첫소리’부터 달랐다. 첫소리부터 잘 냈다. 첫소리를 첫소리답게 냈다. ‘묵직하고 진중한 성음’을 바탕으로 바람처럼, 공기처럼, 물처럼 소리의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바람처럼 평화롭게 날아다닐 줄 알고, 공기처럼 다사롭게 ‘텅빈 충만’을 그려낼 줄 알고, 물처럼 고요하게 스며들 줄 알았다. 피리소리가 곧 생명체임을 인식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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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진정성은 지역성과 밀접하다
소리의 진정성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지역성에서 온다. 나는 이를 특별히 중시하는 한 사람이다. 오초롱은 서도소리를 알았다. 평안도 소리의 성음과 호흡을 알았다. 김성근이 남도소리를 통해 다다른 경지도 인정할 수 있겠지만, 오초롱이 서도소리에서 다다른 경지가 더 높았다.
소리의 진정성 혹은 소리의 지역성과 연관해서 황민왕은 거리가 있다. 황민왕은 지역으로 볼 때는 남해안이다. 남해안별신굿의 이수자이다. 그러나 황민왕의 소리를 들으면서, 남해안이 연상되지 않는다. 황민왕의 소리는 언제부턴가 지역에 기반을 둔 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 말을 바꾸면서, 그만큼 진정성과 거리감이 있는 소리라고 얘기하는 것도 가능하다. 박병천의 소리인 듯 박병천의 소리가 아니며, 김석출의 소리인 듯 김석출의 소리가 아니다. 그가 전 시대의 예인을 모방하고자 함도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이렇게 들을 수밖에 없는 건, 어쩌면 지나간 시간 동안 황민왕 소리가 겹친 무대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황민왕의 소리를 들으면서, 이젠 ‘또 저 소리’, ‘또 저 성음’, ‘또 저 방식’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가 소속된 <나무>와 <블랙스트링> 속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때면 그 안에서 이해가 되고 공감도 된다. 하지만 그것과 벗어났을 땐 더욱더 ‘진정성’과 ‘지역성’과 연관해서 괴리가 느껴진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음악성이 출중하고 공연에서 자기 몫을 잘 해내는 사람이 곧 모든 공연을 살리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던 게 언제부터였을까.
이번 공연에는 <산자를 위한 놀이>가 있었다. 박병천의 ‘상도리돈’과 연관이 있었다. 황민왕과 김인수가 주고받으면서, 박병천의 생전의 구음을 주고받으면서 변주해가는 방식이었다. 공연의 다양성적인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었다. 굿이라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현장이라는 측면에서도 전달되었고, 이걸 관객이 좋아한 것도 사실이다.
나는 ‘해원’이라는 큰 주제와 연관해서 이게 밀접하게 가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공연은 70분이었다. 내용과 형식, 전통성과 동시대성의 조화를 느끼게 해주는데, 한시간(60분)이 딱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빼거나 줄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와 같은 입장에선 <산자를 위한 놀이>가 그랬다.
김인수는 매우 영리한 아티스트였다. 이 공연의 게스트로서 자기가 어떤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았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적정선에서 이 공연에 필요한 타악과 리듬을 잘 공급해주었다.
지 박, 첼로에서 아쟁의 성음이 나오다!
이 공연의 또 하나의 큰 소득은 지 박이라는 첼리스트였다. 그간의 실력도 인정받았지만, 이번 공연에서 그의 활약은 컸다. 이번 공연을 보면 ‘첼로 = 국악기’라고 해도 무관할 정도다. 공연은 2N제곱으로 김성근과 오초롱이 중심이 된다.
공연을 보면서 다소 엉뚱한 생각이지만 ‘3N제곱’ 곧 세 사람의 연주자들이 공존하는 부분에 흥미가 커졌다. 어느 순간엔 첼로에서 아쟁 성음이 나는 것 같았다. 첼로를 마치 아쟁을 다루는 듯한 보잉에 매우 거칠고 시원한 쾌쾌감을 주었다. 국악적인 리듬도 능숙할뿐더러 국악인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호흡이라거나, 국악인이 자연스럽게 늘어지는 부분까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부분은 3N제곱(김성근X오초롱X지박)이 듀오 혹은 트리오로 연주하는 부분이 좀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까지 생겼다.
이 공연의 중요한 소재 중의 하나가 ‘굿’적인 요소인데, 지금 굿적인 공연에서는 리듬이 너무도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서양음악에는 없고 국악에서도 다른 분야와 다른 특정 리듬의 부각이 매우 매력적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공연에서는 이런 ‘장단 혹은 리듬의 남발’이 공연의 정신적인 측면을 바탕으로 한 ‘음악의 사유적인 깊이’와 연관해서 안타까운 경우를 보게 한다. 이번 공연에서도 나와 같은 시각에서 보면 리듬 면에서 덜어낼 부분이 많이 보인다. 덜어낼수록 다른 공연과 더욱 변별성을 갖게 될 것이다. 이 공연만의 매력은 더 두드러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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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에서 많은 훌륭한 작품을 만난다.
2N제곱(김성근X오초롱)의 <해원해줄게요 : REMASTER> (2025. 01. 24~26.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는 진정성이 충만한 작품이었다. 그간 두 사람을 중심으로 만든 최종 결과물이기도 하겠지만, 창작산실의 유통적 측면에선 지금부터 더 많은 수효가 있을 법한 공연이다. 이 공연 자체로, 혹은 이 공연을 바탕으로 해서 또 다른 확장성이 돋보이는 공연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그 공연에서도 이번 공연과 같이 진정성이 충만한 공연이길 희망한다.
아울러 이 공연을 살린 음향(노익환), 조명(김건영), 영상(송지훈), 무대(임민)이 각각 우수했고, 또한 서로 작용하면서 공연의 품격을 높였다는 것도 밝혀야 한다. 무대 위 5인의 예술적인 기량의 우수함이 이들에 의해서 더욱 빛이 났다.
윤중강 음악평론가 themove99@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