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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컬처 세계로] K-드라마의 가능성을 보다_'적로'

기사승인 2024.01.24  20: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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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극 <적로>

2024 <적로> 공연_국립국악원

2024년 국립국악원 기획공연으로 음악극 <적로(滴露)>가 1.17-27까지 열흘간 풍류사랑방에서 공연됐다. 박종기, 김계선 두 대금 명인의 이야기를 소재로 2018년에 서울돈화문국악당 기획공연으로 올려졌던 음악극 <적로>는 당시 돈화문국악당 예술감독이었던 김정승 대금연주자가 기획하고 배삼식 대본, 최우정 음악, 정영두 연출로, 각 분야의 스타성 있는 제작진들이 뭉쳐 드림팀을 꾸렸기 때문에 초기 제작부터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다. 이후 일본 공연도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한국음악극의 해외 진출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현장에서의 반응도 뜨거워 극 후반부에 어김없이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는 청중들을 발견한다. 창작 오페라나 창극에서 대본과 음악, 연출, 연기의 4박자가 정말 잘 맞지 않고서는 창작극이 관객의 눈물샘을 끌어내거나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흔하지도 않을 뿐더러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기존 장르 문법에 익숙한 관객들은 적로의 서사에 사실 의아스러워 한다. 특히 국악인들의 반응은 좀 더 당혹스러울 수 있다.

식민지 옛 수도에서 망국의 한을 품고 우리 음악을 지킨 전통 음악인들의 장인 정신을 형상화시키며 예술을 통한 영웅적 구원 서사를 기대하는, 전형적인 위인전식 음악극의 틀을 벗어나 산월이의 출생 비밀이나 종기, 계선, 산월의 삼각관계와 같은 통속드라마에서 볼법한 서사를 만들기 때문이다.

음악에서도 두가지 의견이 상반되어 나타난다. 하나는 다양한 음악 요소들이 잘 짜여진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서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긍정적 평가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굉장히 서로 다른 음악 재료들이 산만하게 나열된 느낌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적로>를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높이 사는 점은 <적로>가 ‘영웅주의’와 ‘신파’와 같은, 기존 서사 문법의 스테레오 타입에 함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양쪽의 상투적 문법을 벗어나고 있는가?

 

1. 탈(脫)영웅서사가 빚어낸 리얼리즘

<적로>에서 두 남자 주인공, 박종기와 김계선의 관계를 보노라면 서로의 소리를 알아주는 ‘종자기’와 ‘백아’가 떠오른다. 반면에 둘 사이에 존재하며 극중 서사의 구심점을 형성하는 ‘산월이’의 존재는 명인들을 ‘탈신화(脫神話)’화 하고 서사의 초점을 두 남성 예인에서 여성 예인의 삶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종기와 계선은 실존 인물이지만 그들 사이에 교류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기에 가상의 설정이고, 여기에 산월을 둘러싼 허구가 얽혀짐으로써 더 이상 온전한 실존 인물이 아니다. 이에 반해 여자 주인공 산월이(엄마와 딸)는 허구의 인물이나 이 또한 온전한 허구의 인물이 아니다.¹)  1930년대, 경성의 4대 권번을 배경으로 실재했을 예기(藝妓)들의 삶과 죽음이 산월이라는 인물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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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의 허구성과 실재성 사이의 관계를 ‘온전한 실존’과 ‘온전한 허구’로 표현한 것은 김훈의 소설 『흑산(黑山)』의 일러두기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런데, ‘허구적 실제 인물’과 ‘실제적 허구 인물’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탈영웅 서사’는 실제를 경직시켜 왜곡하는 신화적 영웅 서사보다도 영웅들의 인간적 면모를 더 잘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탈영웅 서사’적 리얼리즘이 오롯이 구현되고 있다는 점은 <적로>가 역사적 위인이나 영웅적 인물들을 소재로 하는 기존 음악극(창극이나 오페라 등)과 구별되는 지점이면서 필자가 <적로>를 높이 사는 지점이기도 하다.

2. 신파적 과잉과 산만한 잡종을 넘어서

<적로>는 오페라, 뮤지컬, 창극이라는 기존 장르명을 넘어서서 이 모두를 포괄하는 ‘음악극’을 표방한다. 그런 만큼 작곡가는 하위 장르를 넘어서는 다양한 음악 양식을 사용한다. 판소리, 여창가곡, 남도 무속 음악, 스윙 재즈, 서양 예술가곡과 현대음악적인 어법이 혼재되어 있고 악기도 대금과 아쟁, 클라리넷, 피아노(신디사이저), 드럼 등 양·국악의 혼성 편성으로 구성된다.

사실 탈장르, 탈경계, 혼종(hybrid) 등이 대세가 되는 시대에 다양한 장르와 음악 문법을 적절히 사용하고 섞는 것은 그리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다. 그런데 <적로>는 다양함을 관통하는 ‘라이트 모티브(Leit Motif, 유도 동기)를 집요하게, 그러면서도 자유자재로 카멜레온처럼 변형을 일으켜 극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감동이 점층적으로 누적되는 효과를 불러온다. 이로써 통일성이 결여된 물리적 섞임이 아닌, 강력한 응집력을 갖는 화학적 융합이 음악극 전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프로그램 북의 작곡가 노트에도 나왔듯이, 적로에는 세 개의 음악 주제가 사용되는데, 이 주제들이 어떻게 작품 전체에 걸쳐 효과적으로 운용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이슬’, ‘텅 빔’, ‘네나 나나’, 이 세 개의 주제는 특정 대상과 상황과 짝을 이루는, 바그너의 라이트 모티브처럼 세 개의 유도동기이다. 이 주제 모티브 3개는 ‘적로’ 즉 이슬방울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인데, 음악적으로도 서로 음정 관계상 연관을 가지면서 다양한 결로 분화된다.

 

* 제1동기- 모(母) 동기 –‘이슬’동기

서곡 첫 부분에서 피아노의 강한 타건으로 제시되는 제 1동기는 느린 템포의 4분음표 연속 스타카토로 하강하는 ‘이슬’ 동기이다. ‘이슬’동기는 ‘똑똑 떨어지는’ 이슬의 방향성과 속도감을 나타낸다. 또한 차가운 이슬, 아침이면 사라지는 이슬이라는 이미지를 표상하며 이슬처럼 사라지는 주인공들의 덧없음까지 상징한다. 기본적으로 비극적 정서를 품고 있으나 그 특유의 ‘서늘함’으로 인하여 일종의 소격효과를 낳고 있다.

한편 ‘이슬방울 동기 속에 모든 음악이 함축되어 있다’는 작곡가의 말처럼 이슬방울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제1동기(‘이슬’)는 제2동기(‘텅 빔’)와 제3동기(‘네나 나나’)를 잉태하는 ‘어머니(母)동기’에 해당한다. 어머니 동기는 자칫 산만해 보일 수 있는 여러 음악 재료들과 양식들을 극적 전개속에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코어를 담당한다. 극 전체가 이질적인 음악의 단순한 나열이 아닌, 화학적 응집력과 함께 구심점이 단단한 확장성을 갖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제2동기-‘텅 빔’ 동기

제2동기는 8분음표의 연속 리듬으로 완전5도 병진행하는 동기이다. 내성부에 3도가 빠져 있기 때문에 음향적으로 비어있는 느낌을 준다. 완전 5도 화음의 병행 진행은 결국 대금의 빈 구멍과 투명한 이슬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데, 그 이미지는 ‘텅 빔’이다. 필멸하는 존재의 덧없음, 허무와 공허를 보여준다. 이 동기는 극의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산월과의 이별, 종기와의 이별 등의 상황에 맞는 음악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소격효과로 우리의 이성을 서늘하게 각성시켰던 제1동기와 대조되며 극 후반부에 등장하는 제3동기와 함께 잔잔하면서도 애잔한 정서적 파고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도 장3도나 단3도로 표출되는 직접적인 정서 반응을 끌어내지 않기에 주인공의 사라짐을 과잉된 신파로 빠지지 않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 제3동기-‘네나 나나’ 동기

제3동기 역시 제1동기의 음악세포 중 하나이다. 8도가 1도와 같은 음이면서도 다른 음인 것처럼 결국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극의 결말인 18번 ‘이별’ 노래의 마지막 피날레는 제3동기 외에 제1동기와 제2동기가 함께 나옴으로써 주요 동기 3개가 모두 통합되어 찰나의 이슬방울 같은 생명의 ‘멸(滅)’을 표현한다.

이렇듯 <적로>의 음악 전개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유도동기의 반복과 변주가 극 전체의 음악적 그물망(musical net)을 이룸으로써 다양한 선율이 구심력을 잃지 않고 점층적인 감정 누적 효과를 구현한다는 것이다.

 

 

3. 다양한 양식의 끈끈한 결합

<적로>는 전통가창 양식 중 판소리 외에 정가 양식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계선과 종기는 판소리 가창 양식에 기대어 노래하고, 산월이는 4번(풀잎에 이슬 방울)과 7번(세월은 유수와 같이)에서 정가 가창 양식으로 노래한다. 특히 일패 기생들의 주 종목이 가곡이었기에 산월이 역을 정가 가창자가 담당한 것은 여주인공이 예기임을 음악으로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극의 시대적 사실성을 높여주는 효과도 있다. 무엇보다 하윤주의 산월이 역은 당시 일패 기생의 품격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번 재공연을 통해 하윤주는 산월이 역의 대체불가임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 주었다.

<적로>에서는 판소리와 정가 외에도 다양한 재료와 여러 장르의 음악 문법과 양식이 동원된다. 크게 나누어 보면 예술음악(오페라와 리트)과 대중음악(뮤지컬, 가요, 재즈)적 양식이 혼종되어 있고, 한국음악과 서양음악의 문법이 공존한다.

전통음악에서도 정악(가곡, 청성곡)과 민속악(판소리, 산조, 무가) 양식이 고루 사용된다. 재즈와 왈츠, 민요와 판소리, 창극과 씻김굿, 정가와 시조, 가요와 현대음악적 어법 및 오페라의 유도동기가 국악기와 양악기, 판소리와 정가 창법 위에서 비벼지고 절충되고 병렬되며 혼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재료와 스타일이 특정한 ‘풀’과 같은 접착 장치없이 나열되었다면, 그 잡종적 성격은 매우 산만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적로>는 표면층에서는 각각의 고유 장르 특성(정가, 재즈, 민요, 왈츠, 굿)이 드러나고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배면층에서는 주요 동기(leit motif)가 특정한 연결 장치로 기능한다. 특히 후반부 극적 정점을 향해 갈 때 주 동기들의 반복적 사용은 정서적 환기와 강조를 이루고 페이소스를 누적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

 

 

4. 탈경계와 탈장르로서의 K-뮤직드라마

마지막으로, <적로>에는 닫힘과 열림의 대립되는 두 개념이 공존한다. 작곡가 음악과 연주가 음악의 공존이 그것이다. 작곡가의 엄격한 설계로 이루어진 작곡행위와 연주자들의 느슨한 형태의 구성 및 즉흥연주가 작업방식에서 조화를 이룬다. 연주자들의 창작 작업의 참여가 가장 빛나는 곳은 ‘진혼’ 부분이다. 아쟁과 징이 터벌림, 푸너리, 살풀이 장단을 연주하고 그 위에 남도 계면조의 무가가 불리는데, 영락없는 진혼굿을 연출하며 응축된 슬픔을 매우 처연하게 표현함으로써 극적 하이라이트를 이루고 있다. 

또한 계선과 종기가 음악적으로 대결하는 <용호상박> 역시 연주자들의 손맛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청각적으로 산조와 청성곡으로 산조대금과 정악대금이 서로 겨루고 시각적으로는 등장인물들의 씨름으로 연출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정영두 연출의 재치와 연주자들의 농익은 전통연주가 함께 하여 마당놀이와 창극이 잘 버무려진 음악극의 면모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종합해보건대 전통 춤의 곡선을 품고 있는 정영두의 절제된 연출과 판소리나 정가, 무가 등 전통시가 및 서사문학의 특성을 적절히 녹여낸 배삼식의 대본, 동서양의 다양한 음악어법을 융합시켜 극적 응집력과 감정의 파고를 효과적으로 고조시킨 최우정의 음악은 ‘극 ·시 ·음악’이 결합한 삼위일체로서의 한국음악극 창작에 전통적 양식을 어떻게 결합시켜낼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답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문화적 삼겹살, 아니 오겹살의 중층적 구조 자체가 문화정체성이 되는 21세기 한국의 음악환경을 상기해 본다면 음악극 <적로>가 품고 있는 열린 형태의 잠재성과 경계를 넘어선 유연성은 많은 창작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각 장르의 장점을 취합한 장르적 혼종성 및 탈장르에 성공한 <적로>는 새로운 대안으로서 K-뮤직드라마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또 하나의 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소영 음악평론가 themove99@daum.net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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