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는 메시지다" , 국악관현악 고전적 형태 넘어 과감한 시도 요청된다
1. 창작음악제의 필요충분조건을 갖추다
올해 15회째 음악회를 맞은 ‘아창제’ 국악부문 연주가 2월 1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개최됐다. 아창제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창작관현악축제로 작곡가들에게 매년 몇십대 일의 경쟁을 뚫고 도전하고 싶은 장이다. 관현악작품은 외부의 위촉 없이 작곡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악보 심사로 끝나는 여느 국내 콩쿠르와 달리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협연자나 지휘자, 오케스트라단원에게도 신선한 자극을 준다. 특히 아창제 국악관현악 연주회에서는 유독 주요 악단의 단원들을 비롯한 연주자들과 지휘자들이 많이 눈에 띈다. SNS를 비롯한 온라인상에서도 공연 전후로 반응이 ‘핫(hot)’한 편이다.
올해는 해마다 진행되었던 작품 공모를 하지 않고 기존에 연주된 곡 중에서 5곡을 선정하여 재연주로만 이루어졌다. 관현악 위촉이나 재연이 쉽지 않기에 매년 작품 공모를 기대해 온 작곡가들에게는 공모 기회가 사라져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었겠으나 제3자인 관객으로서는 15주년을 결산하는 이벤트적 성격으로, 기획의 면에서는 꽤 참신한 아이디어라 여겨진다. 실제 현장에서도 15주년을 결산하는 최고 곡이 어떤 곡들인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온 아창제 애호가들과 악단 관계자들이 많았다.
작곡가들의 1차 투표를 거쳐 2차 심의위원들에 의해 최종 선정된 국악 부문의 곡은 이귀숙의 “1900년 파리, 그곳에 국악 그리고 2012”, 손다혜의 “25현 가야금과 국악관현악을 위한 ‘어린 꽃’, 장태평의 “너븐숭이”, 이예진의 “타악기를 위한 협주곡 ‘기우(祈雨)’, 이정호의 “수룡음 계락 주제에 의한 ‘폭포수 아래’ ”였다. 연주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맡았고 지휘는 김성국 작곡가 겸 지휘자가 맡았는데, 최근 3년 동안 원일 지휘,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연주에서 변화된 것이어서 이 역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굿장단의 완벽한 소화 등 김성국 지휘로 밀도 높은 연주
협연자 김인수의 퍼포먼스외 긴 침묵.. 제의의 묵상을 통한 영적 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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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5곡 외에도 기존에 봐왔던 곡 중 눈여겨 봐온 몇 곡이 포함되지 않은 아쉬움이 있었으나 5곡 모두 뚜렷한 서사를 가지고 이를 국악관현악이란 매체로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력을 극대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각각의 답을 마련하고 있다, 또, 굿 장단에 기반을 둔 국악 고유의 리듬 전개를 효과적으로 살리는 등 창작국악관현악곡의 많은 과제를 나름의 방법으로 해결하고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품 선정이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창작연주회의 성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필요요건에 해당하는 것이 작품의 퀄리티라 할 수 있는데, 이번 연주회는 여러 번 검증이 끝난 작품들로 구성되었기에 작품의 질이 고루 높았다.
평소 아창제의 국악관현악 부문을 보면 초연 작품과 재연 작품(기존에 다른 곳에서 연주된 작품들을 응모), 그리고 3번 이상 당선된 작곡가들에게 위촉하는 위촉 작품 등으로 구성되는데, 재연 작품을 제외하고는 위촉을 포함해서 초연 작품의 경우에 작품의 결과가 양악 아창제에 비해 불만족스러울 때가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석에서 어떤 작곡가의 ‘양악은 너무 스타일이 고루하고 국악은 너무 딴따라가 많다’라는 푸념 섞인 비판을 들었는데 필자도 이에 대체로 공감하는 편이다.
그나마 아창제는 초연 곡뿐만 아니라 재연 곡을 공모에 받아 주는 독특한 제도가 있어서 선정 작품의 수준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온 편이라 할 수 있다. 아창제는 여느 콩쿠르나 창작 공모제와 달리 2012년부터 작년까지 선정된 총 171곡 중 재연 곡 선정 비중이 40%에 육박한다. 이러한 재연 곡 공모는 창작곡이 일회용 용기처럼 한번 쓰고 버려지는 한국창작음악계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를 마련하는 좋은 제도다. 재연 곡 공모는 악보와 실제 음향 간의 격차를 줄이고 결과적으로 선정 작품의 질적 수준을 확보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재연 곡들은 이미 연주된 실제 사운드를 듣고 선정되었기에 악보와 음향 간의 갭이 최소화된, 음향적으로 검증된 곡들인 데 비해 초연 곡에서는 질적 편차가 양악 관현악 부문보다 국악 부문이 상대적으로 컸는데 이는 국악관현악의 악기론적, 음향학적 특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국악관현악의 사운드와 악보 간의 괴리가 크다는 것은 국악관현악의 역사가 지난 50년간 급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과도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국악관현악 부분의 심사위원들에게 주어진 일차적 과제는 다양성은 확보하되 완성도 면에서 ‘악보를 위한 악보’를 넘어서 실제 사운드상에서의 수준 편차를 줄이고 질 고른 초연작들을 선정하는 것이다.
창작 음악제의 성공 요인으로서 필요조건이 우수한 작품의 선정이었다면 충분조건에 해당하는 것은 연주라 할 수 있는데, 이번 음악회의 성공은 그 절반이 김성국 지휘자의 완벽하고도 치밀한 분석과 해석, 그리고 지휘의 리더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미 이번에 연주된 5곡을 대부분을 들었던 사람들이나 이미 같은 곡을 연주했던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단원들조차도 ‘내가 연주한(들었던) 이 곡이 기존의 곡과 같은 곡이었던가’라고 감탄할 정도로 이번 연주는 국악관현악의 존재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곡을 발표한 해당 작곡가들의 만족도도 매우 높았음을 확인했다. 악보를 있는 그대로만 연주해주어도 고마운데 그 이상으로 표현해주어 자신의 곡의 잠재성을 최대한 구현해 주었다는 것이다.
김성국의 지휘는 템포와 다이내믹의 긴장과 이완의 운용 능력이 탁월했고, 각 악기군의 소리 배합과 복잡한 굿장단의 완벽한 소화, 단원들에 대한 장악력, 협연자와의 일치된 호흡 등에 있어 밀도 높은 연주를 보여주면서 청중들의 주의를 시종일관 사로잡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예진의 ‘기우제’의 마지막 처리였는데, 협연자 김인수의 사제로서
의 연기적 퍼포먼스와 지휘자의 긴 침묵과 홀을 가득 메운 정적은 제의의 마지막을 묵상을 통한 영적 고양으로 마무리하는 듯했다.
협연자 문양숙, 김인수와 ‘수룡음’의 정가를 맡은 이희재의 역할도 음악회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화룡점정과도 같았다. 끝까지 손뼉을 치고 음악의 마지막까지도 함께 연주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던 관객들의 반응도 여느 음악회보다 훨씬 진지하고 수준 높은 태도를 보여주어서 간만의 흡족한 국악관현악 연주를 감상했다. 성공적인 창작연주회를 위해서 필요충분조건으로서 기획, 작품, 연주, 관객, 이 4박자가 중요한데 이 4요소를 다 갖춘 연주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 고유의 자원에 아이디어와 디지털 매체와의 융합 등
최신 기술 수용하며 스펙트럼 폭 넓히는 조합과 실험
국악관현악의 고전적 형태 넘는 다양하고 과감한 시도가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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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디어는 메시지다.
2023년 9월 2일 “오늘 다시 살핌”이란 주제로 열린 아창제 15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음악학자와 작곡가, 평론가, 지휘자, 연주자가 모여 열띤 토론이 진행됐다. 여기서는 아창제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 반성과 비판적 통찰을 요청하는 래디컬한 발언들과 함께 기술적이고 실질적인 운용의 방법론적 제언까지 다양한 이슈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날 필자의 머리에 지금까지도 일종의 화두처럼 꽂힌 말은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문장이었다. 이를 음악에 적용시키면 관현악이란 매체가 곧 음악적 내용이자 메시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매체는 ‘내용(=메시지)’이 아니라 내용을 담는 ‘그룻’이다. 납작한 접시에 국물을 담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릇이 내용 자체는 아니나 어떤 그릇이 놓이느냐에 따라 담을 내용의 한계도 한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는 메시지다’는 형식이 내용을 견인한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이날 패널 토의에서 나온 ‘국악관현악이란 존재를 당연히 여기지 말고, 국악관현악이 없는 데서부터 음악적 상상을 시작하자’라는 도발적 제언이나 종합토론에서 ‘국악관현악의 존재 이유에 대한 어떤 정당성도 찾을 수 없다’라는 참가자의 신랄한 멘트에 이르기까지 국악관현악의 근본적 한계를 지적하는 비판들이 제기되었다. 이 기저에는 국악관현악을 서양 관현악의 이식으로 보고 작곡과 연주의 분리, 국악기의 서양적 운용, 시김새를 비롯한 연주자의 손맛 결여 등 평소 국악관현악의 음악적 완성도나 방향성에 대한 국악계 전반의 비판적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필자 역시 평소 이러한 문제의식에 깊이 공감하면서 국악관현악의 대안적 실험이나 음악 하기를 눈여겨 봐왔었다.
그런데 창작의 실제 현장에서는 결과의 만족도나 비판적 인식과는 별개로 관현악은 여전히 작곡가들이 가장 욕망하는 뜨거운 매체이다. 연주자 역시 마찬가지다. 연주자들도 관현악의 협연자로서 무대에 오르는 것을 비루투오적인 연주력을 보여주는 최상의 기회로 생각한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국악관현악 창작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은 깊이 공감하지만 그 방향성에 있어서 오케스트라의 해체나 탈(脫) 관현악으로 아창제의 방향성을 바꾸자는 급진적인 의견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창작관현악, 특히 국악관현악의 경우, 관현악이란 매체는 아직 충분히 실험해 보지 못한, 미완성의 근대를 표상한다. 서구에서 말러의 교향곡 이후 관현악곡의 근대성이 종말을 고하고 현대음악계가 실내악 중심으로 돌아섰다고 해서 한국음악계 역시 서둘러 탈근대를 외치는 것은 또 다른 사대주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국악관현악은 1960년대에 본격화되었으니 반세기의 짧은 역사가 있다. 자생적 근대 실험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우리 작곡가들은 아직 배가 고프다. 서구 필하모니 탄생처럼 시민 사회의 인프라가 차분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지지 않은 우리의 경우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위로부터의 근대주의를 어떻게 잘 활용하여 정착시킬 것이냐는 관점으로 운용의 묘와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딱딱한 매체에서 부드러운 매체로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필자가 제언하는 것은 국악관현악을 기존 악단의 기본 편성에 협주 악기와 특수악기 몇 개를 추가하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딱딱한 매체로 상정하여 기술결정론에 빠지지 말자는 것이다. 국악관현악이 서구의 고전, 낭만주의 세계관에서 벗어난 매체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내용물에 따라 형태가 변화무쌍한, 말랑말랑한 ‘자루’와 같은 유연하고 부드러운 매체로의 변용이 필요하다. 예컨대 가무악희의 종합이나 궁중음악에서 등가, 헌가의 이중 합주 편성처럼 전통 고유의 자원에서부터 아이디어를 얻고 디지털 매체와의 융합 등 최신의 기술까지 수용하면서 스펙트럼의 폭을 넓히면 무궁무진한 조합과 실험이 고려될 수 있다. 국악관현악의 고전적 형태를 넘어서는 다양하고 과감한 시도가 요청된다. 이를 통해 아창제 ‘이후’, 아창제 ‘밖’으로 신선한 활력을 부여하면서 국악관현악의 미래를 선도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아창제의 존재이유를 증명하며 시대적 소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이소영 음악평론가 themove99@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