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 원추세포의 축복 - 인간분광계 드뷔시
지휘 : 윤 메르클 Jun Märkl
피아노 : 니콜라이 데미덴코 Nikolai Demidenko
프로그램
드뷔시, 백과 흑 (편곡: 로빈 홀로웨이) *오케스트라 버전 아시아 초연
Debussy, En blanc et noir (arr. Robin Holloway) *Asian premiere of orchestral version
쇼팽, 피아노 협주곡 제2번
Chopin, Piano Concerto No. 2 in F minor, Op. 21
드뷔시, 관현악을 위한 영상
Debussy, Images pour orchestre, L. 122
2018 러시아 월드컵의 최종 우승은 프랑스가 차지했다. 프랑스는 20년 만에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과거 아트싸커의 영광을 재현했다. 프랑스의 거리거리에는 그 열기가 남아있으며, 2018년은 프랑스에게 기념비적인 해가 되었다. 그리고 2018년은 프랑스의 또 다른 기념할만한 이벤트가 진행 중이다. 바로 프랑스가 배출한 불세출의 작곡가 드뷔시의 서거 100주년이 그것이다. 비록 월드컵 열기처럼 뜨겁지는 않으나, 드뷔시의 고향을 포함한 곳곳에서는 그를 기리는 행사가 진행 중이다. 그리고 지난 19, 20일 서울에서도 윤 메르클의 지휘로 드뷔시의 음악세계를 조명하고 기념하는 공연이 있었다.
드뷔시의 흑과 백 오케스트라 버전(로빈 홀로웨이 편곡)을 시작으로 관현악을 위한 영상까지 이어지는 공연은, 시각적인 효과로 가득한 미술관에 가까웠다. 공연장은 미술관을 품었고, 다양한 빛깔은 공연장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색을 인지하게 해주는 원추세포가 발달한 인류는 소리에서도 색감을 상상할 수 있다. 실로 굉장한 축복이다. 오늘 공연에서도 다양한 파장을 지닌 색채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드뷔시는 음들이 보여줄 수 있는 색깔들을 악보 안에 모두 풀어 넣었다. 이미지를 그리면서, 다양한 색을 첨가했지만 혼합된 색은 절대 어두운 계열로 변해가지 않았다. 오히려 밝아졌다. 빛의 3원색인 빨강, 파랑, 초록을 혼합하면 흰색으로 향해가는 것처럼, 소리들은 서로를 끌어당기면 당길수록 눈부셨다. 이베리아(Ibéria)에서는 그 끝을 향할수록, 탬버린, 심벌 등 각종 타악기들까지 모두 혼합하면서 더욱 밝아지고 찬란해졌다.
관현악을 위한 영상이 무대에 울려 퍼지는 동안, 드뷔시는 분명 범인(凡人)과는 다른 경이로운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윤 메르클 역시 평범한 인간들은 인지하지 못하는 색채들까지 소리로 표현하려 고군분투했다. 색채의 음영을 집요하게 대비시켰고, 아주 노련하게 음향을 확장시켜 나갔다. 다양한 악기들은 색채감을 더했고, 서로 어우러지면서 만들어지는 또 다른 색채들 역시 눈길을 끌었다.
드뷔시 곡들 사이에 연주되었던,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도 주목할 만 했다. 절제되고 담담한 연주로 일관했으나, 때에 따라서는 단호하고 날카로운 감각으로 주제를 연주하였다. 다만 오케스트라와 협연자가 서로 사인이 맞지 않는 모습이 보였다. 마디가 어긋나는 경우도 종종 보였고, 피아노가 먼저 클라이막스에 도달해 버리는 순간도 있었다. 앙코르로 보여준 두 곡의 쇼팽 왈츠에서는 니콜라이 데미덴코의 피아니즘이 온전히 전달되었다. 왼손의 흘러넘치는 리듬 속에서도, 절제된 연주를 보여주었다. 템포는 다소 빨랐으나, 흥분을 감추고 균형을 지켰다. 니콜라이 데미덴코가 쇼팽을 생각하는 방식이다.
Claude Achille Debussy. 파리국립음악원의 최고 아웃풋이자 인상주의 음악의 시작을 알린 드뷔시는 근대음악을 설명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드뷔시 서거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 곳곳에서는 드뷔시의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며, 그를 기억하고 있다. 월드컵 우승의 영광은 프랑스 자국 내에서만 누렸지만, 드뷔시의 존재와 그의 서거는 전 세계인이 기념하고 있다. 역시 스포츠에는 국경이 있지만,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
허명현(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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