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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는 소리도 노래가 된, 송서(誦書)

기사승인 2018.02.11  09:3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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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국 _노원문화예술회관 관장

 

조선 중기의 문신 김안국(金安國)은 청년 시절에 사랑방 마루에 홰나무를 심고 낮에는 동무들과 나라의 정세와 문장을 논하고, 밤에는 학문에 정진하며 글을 읽었다고 한다. 한 양가집 규수가 그의 사랑방 담 너머에 살았는데 안국의 글 읽는 소리에 반하여 결국 담장을 타고 들어왔다. 그녀가 김안국 책 읽는 소리에 이끌려 그의 방에 들어서니 김안국은 의관을 점잖게 차려입고 책상에 책을 읽고 있다가 놀라 처녀를 쳐다보고는, 이 밤중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의 글 읽는 소리에 반하여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말을 듣자, 그는 “양가집 처녀로서 가문을 생각하라”고 하고는 회초리로 처녀의 종아리를 피가 나오도록 때렸다. 그리고는 “이것은 그대의 못 된 마음을 가려주는 것이오. 이제 가문으로 돌아가 좋은 어머니가 되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되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이런 저런 옛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밖에도 달 밝은 밤 선비의 글 읽는 소리에 반해 자신도 모르게 선비의 방에 이끌려 들어간 규수의 사랑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옛 선비들은 낭랑한 목소리로 글을 읽어 내려가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학동들은 서당에서 훈장님 앞에서 천자문, 명심보감, 소학의 문구를 운율에 얹어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내가 어릴 때만 하여도 어르신들이 신문이나 소설책을 펼쳐 드시고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가시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지금도 부모님들이 제일 좋아하는 소리는 자녀들이 공부방에서 책을 읽어 내려가는 소리일 것이다.

우리의 전통음악 중 한글이나 고문(古文)으로 된 책을 읽을 때 가락을 넣어 구성지게 낭송해 나가는 것을 송서(誦書)라고 한다. 송서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조선조 지식계층에서는 시나 산문을 눈으로만 읽기 보다는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중요시 여겼으며, 현재도 한문학자들은 책을 소리 내어 읽는 문화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 송서의 역사가 오래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송서는 독서성에서 출발한 음악 양식이나 사실 글방에서 책을 읽는 독서성과는 구별되는 가창 양식이다. 송서는 그 음악양식에 익숙하도록 음악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부르기 쉽지 않아 전문적인 수련을 받은 전문 가객들에 의하여 독특한 음악어법으로 세련되게 부르던 성악 형식으로서 소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송서는 각 지역마다 그 지역의 음악적 특색을 담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서울 및 경기지역은 문화의 중심지였던 만큼 송서가 좀 더 음악적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승되어 온 송서는 <삼설기> 등의 '경기 송서'와 <추풍감별곡> 등의 ‘서도식 송서’로 나누어진다. 송서와 유사한 성악 형식으로 율창(律唱)이라는 것이 있는데 오언율시(五言律詩)나 칠언율시(七言律時)와 같은 한시(漢詩)를 노래조로 읊는 것을 가리키는데 시창(詩唱)이라고도 한다. 한시는 신광수(申光洙)의 <관산융마>를 비롯해 권근의 <영남루시>, 심영경의 <경포대>, <죽서루시> 등이 있다. 송서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 및 유물은 1930년대에 와서야 확인할 수 있으며 1930년대의 자료는 '유성기음반'과 '경성방속국의 방송목록' 등의 자료인데 당시에 다수의 창자와 곡목으로 녹음되고 방송되었던 것을 보면 당시까지는 꽤 폭넓게 향유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에는 대중에게 사랑받는 음악양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만 하더라도 송서를 즐기는 향유 층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는데, 전통사회가 붕괴되면서 송서 향유 문화는 사라졌고, 최근에는 전문 음악인들에 의해 송서가 연주회장에서 불리는 경우조차 흔하지 않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전통사회가 붕괴되고 외래로부터 유입된 음악 중심으로 새로이 음악문화가 편성되는 과정에서 잡가나 민요와 같은 대중적인 소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향유 층이 적었던 송서 소리는 공연의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송서는 일제강점기 이후 전통사회의 붕괴와 함께 그 향유 층이 급격히 줄어들어 점차 전통음악사회의 주류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나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였던 고 묵계월 명창이 16세가 되던 1936년도에 스승 이문원을 처음 만나 송서를 배우기 시작하여 ‘경기 송서’ 중 <삼설기>를 비롯한 <짝타령>과 <등왕각서>, <적벽부> 등을 전승하였으며, 묵계월은 그의 문하생인 유창과 박윤정 등에게 송서(<삼설기>, <짝타령>, <등왕각서>, <적벽부>)를 전승하여 현재 그 명맥이 간신히 전승되고 있다. 송서가 2009년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제41호로 지정되었고 유창 명인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어 매년 발표 공연을 열고 있으니 시간을 내어 송서 공연을 꼭 관람해 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THE MOVE Press@ithemove.com

<저작권자 © THE MOV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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